농구하면서 모욕을 당할 때가 종종 있다. 8월의 첫날도 그랬다.
게스트로 온 사람 중 마르고 작은 목걸이를 한 가드가 들어왔다.(농구는 10명이 안되면 게임이 불가능하므로 게임인원이 부족하면 게스트를 모집한다.)
근데 그 녀석, 시작하면서부터 별별 명령을 다 한다.
늦게 오는 바람에 몸도 못풀고 바로 시작해서 조심히 움직이는데 게스트가 준 패스가 왔다.
전에 말했듯이 나는 3점 슛을 잘 못 쏜다. 3점 슛을 쏠까 하다 자신이 없어 돌파를 했는데 그만 막혔다.
돌파에 실패하고 백코트를 하는데 그 친구가 다가오더니 말을 건넸다.
"바로 슛 쏴야지. 찬스인데."
언제 봤다고 반말이지? 왠 훈수질이지? 당황스러운 첫만남이었다.
게다가 수비할 때 가관이었다. 보통 수비는 각자 이해한 바도 달라서 낯선 사람과 수비할 땐 서로 수비 훈수질을 잘 안 하는 편이다.
"앞으로 더 붙어! 붙어!"
'이미 수비하러 앞에 있는데 뭘 더 붙으라는 거야?'
내가 20대였다면 뭔 뚱딴지 같은 소리냐며 받아쳤겠지만, 40을 코앞에 둔 나는 저런 잡소리에 이제 모르는 척 하는 정도의 여유는 있다. 평소처럼 가볍게 무시해줬다. 보통 이러면 조용해지는데, 아 잔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이래라 저래라 계속 옆에서 쫑알대는데 말보다 더 화가 나는 건 이 녀석 본인 수비였다.
보통 2-3로 수비를 하면 앞선 수비 2명이 하이 포스트(프리드로우 던지는 곳) 를 비워주면 안 되는데 비워두고 반대편에 서 있었다.
'왜 저기에 서 있지? 상대는 덕분에 마음 편히 패스가 돌고, 골 먹히잖아?'
큰 소리 내는 걸 싫어하고, 내향적인 농구인은 괴롭다. 이 훈수질에 내로남불인 게스트 덕에 경기하는 내내 집중이 안됐다. 게다가 골을 먹히면 자꾸 내 탓을 미치겠다.
결국 나는 이 친구가 뛰는 쿼터에만 안 뛰기로 했다. 체력소모가 심해서 10명이 있으면 다섯명씩 나눠서 5명이 한 쿼터 뛰고 한 쿼터 쉬고 이런 방식인데, 내가 한 번을 더 쉬어버리면 이 사람과 안 뛸 수 있는 거다. 그래서 이제 다른편이 되서 맘편히 다시 게임을 했다. 그 놈이랑 안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중간에 사람들이 우루루 집에 가는 게 아닌가? 돌아가면서 쉴 인원이 없자 다시 그 녀석과 한 팀이 되어버렸다.
근데 이 게스트, 한술 더 떴. 갑자기 수비를 바꾸자고 하더니 3-2를 할테니 나보고 가운데를 서라고 한다. 보통 3-2는 키가 큰 사람이 가운데 선다. 골 밑으로 패스가 바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나는 키가 작다. 172 밖에 안되는데 이게 뭔 소리야.
역시나 수비는 처참했고, 게다가 그 놈은 옆에서 도움 수비 하나 안 해주며 날개에 서서 수비가 실패할 때마다 '끝까지 막아야지.'라며 질책을 했다.
눌러 놓았던 화가 폭발했다. 나는 다음 공격에 공을 거칠게 몰고 상대와 몸을 세게 부딪쳤다.그리고 대충 슛을 갈겨버렸다. 그런데 그게 하필 들어갔다.밖에선 환호하고, 나는 똥씹은 얼굴로 돌아왔다.
이런 똘기 충만한 게스트와 같은 편이 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이 있다. 수비 자리를 바꾸는 거다. 옆에서 종알대는 게 싫으니 아예 뒤로 가는 거다. 나는 짜증이 치밀어서 '나 못 뛰니까 뒤에서 수비할게.' 라고 선언했고 다음 쿼터가 시작됐다.
그때 그 게스트를 데려온 00년생 친구가 그 녀석에게 지시했다.
"야, 이번에 압박수비해. 앞에서부터 좀 막아."
"예."
00년생이면 나보다 14살이 어린데 걔보다 어리다고? 그럼 대학생?
띠동갑보다도 어린 애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지적을 했다는 걸 깨닫자 한숨이 나왔다. 원래 가장 무서운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나. 내 옛날 생각도 나기도 했다. 나도 한창 젊은 시절에는 내가 아는 수비법이 맞다고 강하게 믿었다. 지금은 결국 최고의 수비는 최고의 소통이며,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여튼,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남의 팀에 게스트로 들어와서 저렇게 훈수질을 하는 정신을 가졌는지 놀랍다.
내가 뒷선 수비를 하겠다고 하고 멀어졌다. 그랬더니 좀 나았다. 그놈의 조잘거리는 소리를 안 들어서 수비에 신나게 집중했다.
점수는 9대 8. 우리가 1점 앞선 상황. 상대편의 마지막 공격이었다. 상대 에이스에게 공이 갔다. 하필 내가 그 에이스 앞에 있었다. 여기서 먹히면 역전당할 상황에서 검은 타이즈를 한쪽 발에 신은 상대편 에이스가 돌파하는 척을 했다. 나는 쳐지는 척을 했다. 그러자 속은 줄 알고 상대 에이스가 3점슛을 올랐다. 나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바로 점프를 떴다. 만세를 하듯 팔을 쭉 펴 올리자 손에 공이 걸렸다. 승리. 승리였다. 내 멋진 블락으로 이번 쿼터를 이겼다.
그런데 그 녀석이 다가오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잘했어."
나는 바보처럼 얼떨결에 손을 마주쳤다.
집에 와서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며 과자를 거칠게 씹었다. 나이 먹어서 계속 농구판을 다니는 이유가 뭘까? 도대체 우리는 왜 늙어서도 저렇게 유령처럼 농구판 위에서 젊은 애들과 뛰어야 하는 걸까 생각을 하다가 김현 선생님이 일기장에 남긴 말씀을 떠올렸다.
'인생은 살 만하다. 살아서 추한 꼴 다 봐야 한다.'
그래. 추한 꼴 다 보면서 사는 게 인생이니까. 늘 성장만 하고 인정받는 세상에 살던 게 30대까지였다면, 40대부터는 추한 꼴 다 보는 시기니까. 이 나이까지 올라오는 과정에서 기쁨이 있었듯이 앞으론 모욕적인 사건들이 계속 일어날 거다. 그게 이야기 거리일 테고...
어린애가 반말한 거면 내가 어리게 보인다는 게 아닐까? 라는 정신승리도 해본다. 아니지, 내가 키가 작고 마르고 플레이가 어수룩하니까 만만하게 본 거야. 그거면 어떻고 저거면 어떠랴. 여튼 이상한 놈은 계속 앞으로도 만날 거다.
이런 얘기를 종종 하면 귀족스포츠인 테니스를 하는 아내는 내게 말한다.
"농구 진짜 신기해. 난 그런 일 당하면 다신 안 나갈텐데."
맥주캔을 찌그러뜨리며 그 녀석을 다음에 만나면 똑바로 지적해줘야 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