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첫 모금의 온도

by 유리사탕

주전자 안에서 물이 끓기 시작하는 소리는 한 가지가 아니다. 처음에는 바닥에서 작은 기포들이 올라오면서 내는 잔잔한 딸깍거림, 그다음은 기포가 커지면서 수면을 밀어 올리는 둔탁한 울림, 마지막에는 뚜껑이 미세하게 들썩이면서 내는 금속성의 떨림. 나는 그 세 단계를 모두 듣고 나서야 불을 끈다. 95도. 커피를 내리기에 가장 좋은 온도는 85도에서 92도 사이라고 하지만, 나는 불을 끄고 삼십 초를 센다. 그 삼십 초 동안 물이 식으면서 내는 소리는 없다. 소리의 부재를 세는 것이다. 주전자의 금속 표면에서 열기가 빠져나가면서 미세한 수축음이 날 때도 있지만, 그건 귀를 가져다 대야 들을 수 있는 정도의 소리라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드리퍼를 올린다. 하얀 도자기 드리퍼 위에 종이 필터를 얹고, 접힌 부분을 손가락으로 눌러 벌린다. 필터의 질감은 한지와 비슷한데 좀 더 거칠고, 물에 닿으면 금방 축축해지면서 드리퍼 벽에 밀착된다. 뜨거운 물을 조금 부어 필터를 적신다. 린싱이라고 하는 과정인데, 종이의 냄새를 빼고 드리퍼를 데우는 역할을 한다. 물이 필터를 통과하면서 서버로 떨어지는 소리가 가볍게 난다. 그 물을 버린다. 원두를 갈아 넣는다. 이십 그램. 손으로 감을 잡는 것이지 매번 저울을 쓰지는 않는다. 스푼으로 두 번 반. 그 정도의 양이 드리퍼 안에서 작은 언덕을 만든다. 갈린 원두의 표면은 매끄럽지 않다. 미세한 입자들이 불규칙하게 쌓여 있고, 그 사이에 공기가 갇혀 있다. 손가락으로 드리퍼 옆면을 가볍게 두드려 표면을 고른다. 곧 물이 그 공기를 밀어낼 것이다.



첫 번째 물줄기를 붓는 순간이 가장 좋다. 가늘게, 원두 한가운데에, 동전 크기만큼만. 뜨거운 물이 마른 원두를 만나면 거품이 올라온다. 갈색 거품. 커피를 내리는 사람들은 이것을 뜸 들이기라고 부른다. 원두가 가스를 방출하면서 부풀어 오르는 과정인데, 신선한 원두일수록 거품이 풍성하고, 그 풍성함의 정도로 볶은 날짜를 가늠할 수 있다. 오늘의 원두는 볶은 지 일주일쯤 된 것이라 거품이 적당했다. 너무 활발하지도, 기운 없지도 않은. 마치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것 같은 움직임으로 원두 표면이 둥글게 솟아올랐다. 그 둥근 표면에 작은 구멍들이 하나둘 뚫리면서 가스가 빠져나갔다. 원두가 숨을 쉬고 있었다.



삼십 초를 기다린다. 뜸을 들이는 시간. 그 사이에 부엌에 냄새가 퍼진다. 아직 커피가 아닌 냄새. 원두가 물을 머금으면서 내놓는 최초의 향은 좀 더 날것에 가깝다. 견과류를 볶을 때 나는 고소함과, 약간의 탄 냄새와, 흙 같은 것이 섞인. 커피숍에서 맡는 향과는 다르다. 좀 더 가깝고, 좀 더 거칠고, 좀 더 진하다. 코로 깊이 들이마시면 비강 안쪽까지 향이 도달하는 느낌이 있다. 나는 이 냄새를 좋아한다. 완성되기 전의 냄새. 무언가가 되어가는 중간의 냄새. 완성된 것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과정 속의 날것스러움이 있다.



두 번째 물줄기부터는 원을 그리며 붓는다. 중심에서 바깥으로, 다시 바깥에서 중심으로. 천천히. 물줄기가 원두 위를 지나갈 때마다 표면의 색이 달라진다. 처음에 마른 갈색이었던 것이 물을 머금으면서 짙어지고, 거품 사이로 검은 액체가 비친다. 드리퍼 아래 서버에 커피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한 방울, 두 방울, 그리고 가는 줄기로. 그 줄기가 서버 바닥에 닿으면서 내는 소리는 물이 물을 만나는 소리인데, 높고 맑다. 서버에 커피가 차오를수록 그 소리의 음이 낮아진다. 액체의 깊이가 소리의 높이를 바꾸는 것이다. 서버 안에서 커피가 돌면서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고, 표면에 미세한 기포들이 맺혔다가 터지는 것이 유리를 통해 보였다.



세 번째, 네 번째 물을 붓는 동안 나는 거의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물줄기의 굵기, 원의 크기, 속도, 그런 것들에 손이 집중하고 있으면 머릿속이 조용해진다. 명상이라고 부르기엔 대단한 것이 아니고, 그냥 삼 분 정도 다른 것을 잊는 시간이다. 일의 마감도, 어제 읽고 답하지 않은 메시지도, 주말 약속도 전부 물줄기 바깥에 있다. 이 삼 분이 끝나면 다시 돌아올 것들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손목의 각도에만 정신이 있다.



커피가 다 내려졌다. 서버에 담긴 액체는 진한 갈색이고, 빛에 비추면 가장자리가 호박색으로 투명해진다. 컵에 옮겨 따른다. 나는 머그컵보다 얇은 도자기 잔을 좋아한다. 손에 닿는 면적이 작고, 그래서 커피의 온도가 손바닥이 아니라 손가락 끝으로 전해진다. 잔을 감싸 쥐면 열기가 손가락 관절 하나하나에 스며든다. 겨울에는 이 열기가 위로이고, 여름에는 불편이다. 지금은 이른 봄이라 그 중간 어디쯤. 따뜻하되 뜨겁지 않은. 잔의 표면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것이 역광으로 보였다. 가는 선들이 위로 흩어지다가 공기 속에 사라지는 것.



첫 모금을 입에 대기 전에, 향을 먼저 맡는다. 잔에서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올라오는 향은 아까 드리퍼에서 맡은 것과 또 다르다. 좀 더 둥글고, 좀 더 달고, 좀 더 완성되어 있다. 초콜릿 같기도 하고, 마른 과일 같기도 한. 같은 원두에서 나온 향인데 단계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향을 맡는 동안 입 안에 침이 고인다. 몸이 맛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입술에 닿는다. 첫 모금. 혀끝에 먼저 닿고, 혀 양옆으로 퍼지고, 목으로 넘어간다. 그 순서가 이 초 안에 일어나는데, 각 단계에서 맛이 다르다. 혀끝에서는 산미가 먼저 온다. 과일의 산미와 비슷한, 밝은 맛. 혀 양옆으로 퍼질 때 쓴맛이 뒤따라온다. 그런데 이 쓴맛이라는 것이, 좋은 커피에서는 불쾌하지 않다. 카카오의 쓴맛, 짙은 차의 쓴맛과 같은 계열의 것으로, 혀 위에 머무르면서 고소함으로 바뀌어간다. 쓴맛과 고소함의 경계는 생각보다 얇다. 로스팅 정도, 물의 온도, 추출 시간, 그 모든 것이 그 경계의 위치를 밀리미터 단위로 옮긴다.



목으로 넘긴 후 입 안에 남는 것을 여운이라고 한다. 좋은 커피의 여운은 오래간다. 입을 다물고 코로 숨을 내쉬면 비강 뒤쪽에서 향이 다시 올라온다. 역향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건 마시기 전의 향과 또 다르다. 좀 더 깊고, 좀 더 따뜻하고, 좀 더 안쪽에서 온다. 이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두 번째 모금을 마시면 맛이 겹쳐지면서 더 풍성해지고, 여운이 사라진 후에 마시면 다시 처음처럼 선명해진다. 나는 보통 여운이 반쯤 남았을 때 다음 모금으로 넘어간다. 그게 내 리듬이다.



잔이 식어간다. 처음에 뜨거웠던 커피가 미지근해지면 맛의 구조가 바뀐다. 산미가 더 또렷해지고, 쓴맛이 줄어들고, 단맛이 올라온다. 같은 잔인데 시간이 지나면 다른 커피가 된다. 나는 뜨거울 때의 맛도, 식었을 때의 맛도 각각 좋아한다. 하지만 가장 좋은 온도는 그 사이 어딘가, 입술에 닿았을 때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그 지점이다. 그 지점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몇 모금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 잡으려 하면 이미 지나가 있는 온도.



매일 마시는 커피인데, 매일 같지 않다. 어제보다 물을 조금 빨리 부었을 수도 있고, 원두의 상태가 하루 더 숙성되었을 수도 있고, 내 컨디션에 따라 혀가 감지하는 것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변수가 많다.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 사이에서 매번 조금씩 다른 결과가 나오고, 그래서 매일 아침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데도 지루하지 않다. 같은 원두, 같은 도구, 같은 손인데 어제의 커피와 오늘의 커피가 다르다. 그 차이는 크지 않다. 아주 미세한 것이다. 하지만 매일 마시는 사람만이 감지할 수 있는 차이가 거기 있고, 그 차이를 알아차리는 순간이 이 루틴을 계속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빈 잔 바닥에 커피 자국이 남아 있다. 동그란 원 모양으로. 햇살이 잔 안쪽을 비추면 그 자국의 농도 차이가 미세한 그러데이션을 만든다. 가장자리가 진하고 중심이 옅은, 한 잔의 커피가 지나간 흔적이 거기 있다.



다음 잔은 내일 아침이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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