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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츄르 Mar 23. 2021

14_가전제품 연대기

 내가 가장 애정을 갖고 있는 가전제품은 세탁기다. 이사오기 전 1년 넘게 세탁기 없이 살았기 때문이다. 전에 살던 반지하 집들에는 다용도실이 없어서 세탁기를 화장실에 둘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첫 번째 반지하에는 화장실에 통돌이 세탁기가 있어서 그걸 썼었다. 그런데 샤워도 하고 세탁도 하다보니 세탁기 표면에 물 때가 끼었고, 탈수가 될 때마다 세탁기가 벽에 부딪히며 진동해 위층에서 항의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그렇다보니 항상 눈치를 보며 세탁기를 돌렸다. 샤워할 때는 세탁기의 거대한 몸집 때문에 어찌나 불편한지 변기와 세면대에 물을 뚝뚝 흘리지 않고서는 몸을 다 씻을 수가 없었다. 


두 번째 반지하 집에는 세탁기가 없었다. 중고로 15만원이면 세탁기를 살 수 있었지만, 집에서 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에 코인세탁방이 있는 것을 보고 세탁기 없이 지내기로 했다. 화장실도 넓게 쓰고, 세탁기를 돌릴 때마다 소음 눈치도 보지 않으니 얼마나 편할까 싶었다. 처음 몇주는 할만 했다. 일주일치 세탁물을 모아 토요일 낮에 코인세탁방에 방문했다. 코인세탁방 바로 옆에 분위기 좋은 카페가 있어서 세탁이 다될 때까지 커피를 마실 수도 있었고, 근처의 숲길공원을 한바퀴 돌고올 수도 있었다. 일주일치 세탁물이 조금 무겁기는 하지만, 세탁의 의무조차 없다면 햇빛 한 점 안 드는 반지하에 하루 종일 박혀 있을 테니 이렇게라도 나오는게 낫다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세탁방에 가는게 버거워졌다. 항상 날이 좋다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앞이 안보일 정도로 비가 세차게 내릴 때도 있었고 숨이 턱턱 막힐 만큼 덥거나 춥기도 했다. 속옷까지 죄다 가져가 빨아야 하는데 세탁방에 사람이 많으면 창피하고 눈치가 보였다. 그렇게 토요일의 기분좋은 외출이던 코인세탁방 방문은 점점 하기 싫은 숙제로 변해 갔다. 결국 너무 피곤한 날엔 세탁 수거 배달 어플을 이용해 코인 세탁방 비용의 2,3배를 주고 세탁을 맡겼다. 이도 아니면 한번 입을 옷에 패브리즈를 뿌려 두 번 입는 꼼수로 어떻게든 세탁을 미루었다. 


코로나 이후에는 세탁방에 가는 일이 더욱 버거워졌다. 매일 소독을 한다곤 하지만 기본적으로 깨끗한 세탁방은 아니었기에 신뢰가 가지 않았다. 주로 유학생이 주 고객이라 입출국이 봉쇄되기 전에는 그들과 마주치는게 두렵기도 했다. 실제로 그 동네에서 외국인이 유학생 자녀를 보러 입국했다가, 코로나가 걸린 채로 숨어 있다 들키는 사건도 벌어졌다. 그렇게 코인세탁방에 방문하는 일은 단순히 힘들고 귀찮은 일에서 위험한 일로 레벨 업 됐다. 결국 나는 내가 살아생전 결코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바로 손빨래. 매번 세탁수거 어플을 이용하자니 비용 부담이 되고 출근은 해야했기에 어쩔 수 있나? 손빨래라도 할 수밖에.

속옷 이상의 것을 빨아본 적이 없던 나는 남방, 슬랙스, 청바지처럼 난이도 높은 옷들을 직접 빨아 입기 시작했다. 손이 부르트고 손목이 아팠다. 이렇게는 못 살겠다 싶었다. 하지만 어차피 오래 살 것 같지도 않은 집에서 세탁기를 사고 싶지는 않았다. 이사가면 반드시 좋은 세탁기를 사리라.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사 온 후 가장 급하게 주문한 게 세탁기였다. 세탁기의 기종에 대해선 별 고민이 필요없었다. 나는 어떤 고민도 없이 9킬로그램짜리 건조겸용 드럼세탁기를 주문했다. 가격은 60만원. 내게는 무척 큰 돈이었지만 이정도는 투자하고 싶었다. 수년 전 친구 자취방에 놀러갔다가 건조겸용 드럼 세탁기를 봤었는데 그게 엄청 부러웠었기 때문이다. 그땐 굉장히 비쌌던 것 같은데 요즘은 유행이 지나기도 했고 물가도 올라서 다른 기종 대비 크게 부담스럽진 않았다. 요즘엔 건조기와 세탁기를 따로 구입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면 너무 비싸고 그 두 개를 다 둘만한 공간도 없었다. 어차피 정말 급하지 않으면 건조 기능을 쓸일도 별로 없으니 겸용으로도 충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9kg보다 큰 세탁기를 주문했으면 큰일 났겠구나 싶다. 서재 옆에 붙어있는 우리집 다용도실은 폭이 엄청 좁아서 세탁기가 들어가는 자리에 9kg 세탁기가 꽉찼다. 그쪽 수도에는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 찬물 세탁을 해야 한다고도 했다. 뜨거운 물로 세탁해 옷이 줄어드는 것보다 찬물 세탁만 하는 게 나으니 그런건 상관 없었다. 세탁기가 오자마자 모아뒀던 빨랫감을 한번에 빨고 건조까지 시켜보았다. 첫 번째 반지하 집의 낡아빠진 세탁기 덕에 세탁기라는 가전에 대한 나의 기대치는 한없이 낮아져 있었다. 덕분에 이번 세탁기는 만족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탈수할 때 본체가 흔들리지 않고 세탁기 앞에 물이 새지 않는 것 만으로도 기뻤다. 건조까지 끝나고 보송보송 잘 마른 수건을 세탁기에서 빼내 얼굴에 갖다댔을 때는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났다. 지금도 세탁을 돌려놓고 글을 쓰고 있는데 달칵달칵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무척 사랑스럽게 들린다. 작고 예쁜 내 세탁기야, 오래도록 함께 하자꾸나.     


내가 두 번째로 애정을 갖고 있는 가전은 진공 블렌더다. 매일 아침 정성껏 야채를 씻고 잘라 블렌더에 넣고 갈아 먹는다. 야채만 갈면 도저히 먹을 수 없어서 과일도 한 가지씩 넣는다. 키위 넣는 걸 좋아하지만 너무 비싸서 요즘은 사과를 넣는다. 바나나를 넣는게 가장 달고 맛있으나 고당 과일이라 잘 사용하지 않는다. 아침마다 진공 블렌더가 힘차게 갈아낸 스무디를 먹으면 어쩐지 힘이 난다. 진공 블렌더로 갈아낸 스무디는 일반 믹서기로 간 것과는 달리 색상이 선명하다. 갈아낼 때 공기가 적게 들어가 그렇다고 한다. 영양분도 더 살아있다하니 건강에도 좋다. 그린스무디를 주로 해먹지만 기분이 내킬 때는 단호박 스프를 해먹기도 한다. 닥터로빈 스타일로 단호박 속을 파낸 것에 두유와 올리고당을 넣고 갈아낸 뒤 살짝 데워서 빈 단호박 껍데기에 다시 넣으면 보기에도 좋고 맛도 좋은 근사한 요리가 된다. 너무 쉬워서 요리라고 하기엔 민망하지만 말이다. 단호박을 갈 때 삶은 고구마를 조금 넣어도 고소하고 맛있다. 


아침마다 그린스무디를 갈면서 진공블렌더의 힘찬 소음을 들으면, ‘오늘 하루도 제대로 시작하는구나.’ 싶어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진공블렌더는 20만원짜리로 내 기준으로는 말도 안되게 비싼 가전이었지만 벌써 20만원 어치는 뽑아내고도 남았다. 그린스무디를 매일 챙겨 먹으니 화장실도 잘 가고 활력이 넘친다.      

한 번도 갖고 싶었던 적 없고 필요한 적도 없었는데 의외로 잘 쓰고 있는 가전도 있다.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전기밥솥이다. 원래 밥솥 없이 살았는데 엄마가 그걸 알고서 기절할 듯이 놀랐다. 그리고는 이모한테서 얻어온 밥솥을 내게 떠맡겼다.

“자취한다는 애가 밥솥 없이 어떻게 살아!”

지금까지 잘 살았는데 뭔 소리래? 나는 엄마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밥솥을 중고 거래 사이트에 올려버렸다. 하지만 2만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을 측정했음에도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조금만 돈을 더 쓰면 새 밥솥을 살 수 있었다. 밥솥계의 유명한 브랜드인데 멀쩡한 걸 버릴 수도 없고, 애물단지가 따로 없었다. 실은 엄마 몰래 버릴까 말까 백번 정도 고민했으나 들켰을 땐 경을 칠게 분명했다. 결국 그냥 갖고 있기로 했는데 의외로 자주 쓰고 있다. 밥같은 건 죽어도 안해먹을 줄 알았는데 돈 없고 배고프니 전기밥솥 만한 효자가 없었다. 씻어나온 현미쌀 10kg을 한번 사두니 쌀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고 간장에 참기름만 있으면 후다닥 밥을 해서 한 끼를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었다. 냉장고가 텅 비었는데 장보러가기 귀찮고 배달을 시키자니 불어난 뱃살이 신경쓰일 때도 밥솥 덕을 톡톡히 봤다. 100% 현미밥은 소화가 잘됐고 화장실에 잘 가게 되어 그런가 많이 먹어도 다음날 몸무게가 늘지 않았다. 그리고 밥솥에는 내가 몰랐던 꿀 기능이 있었다. 엄마가 김치만두를 줘서 어떻게 먹어야하나 고민했는데 밥솥에 물이랑 넣고 ‘찜 기능’을 선택하니 기가 막히게 만두가 쪄졌다. 이 기능을 이용하니 고구마도 폭신하니 잘 삶아졌다. 애물단지로 여겼었는데, 지금은 밥솥없이 어떻게 살까 싶다. 어른들 말 틀린 거 없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밥솥은 죽어도 있어야 한다’는 엄마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뭐 없었으면 없는대로 살았겠지만 한 번 써보니 없이는 못살겠다.      


없이는 못 사는 가전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드라이기다. 반지하 시절 드라이기가 고장나 새 드라이기가 배송되는 3일 동안 드라이기 없이 산 적이 있었는데 세탁기 없이 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편했다. 고장난 김에 좋은걸 쓰자 싶어 미용실에서 쓰는 전문가용 드라이기를 샀다. 결과는 대만족. 사이즈가 좀 큰 감이 있지만 바람의 세기가 일반 드라이어와는 비교되지 않는다. 단발이었을 땐 머리를 다 말리는데 2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드라이어는 4년째 고장 없이 아주 잘 쓰고 있다.      


생활을 편하게 해주는 가전제품들을 떠올릴 때면 현대 사회에서 태어난 데 감사하게 된다. 옛날 같았으면 1%의 나으리들(?)이나 가능했을 편리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다행히 나는 최신 에어드레서, 에이아이 세탁기, 비무슨포크 냉장고를 욕망하지는 않기에, 나는 내 눈에 거슬리지 않고 내 생활에 큰 도움을 주는 내 가전제품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제 갖고 싶거나 필요한 가전은 하나도 없다. 내게 딱 적당한 수의, 알맞은 기능을 하는 가전제품들을 갖고 있어서 매일매일이 더 편안하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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