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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츄르 May 17. 2021

내 친구의 방

고백하자면 3월부터 내 생활에 정체기가 왔다. 불타오르던 신년의 열정이 씻은 듯이 사라진 상태였고, 하루하루 그저 무사히 살아내는 게 그 날의 목표였다. 맛있는 걸 먹거나 재밌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땐 즐거운데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스르르 잠드는 순간이 가장 행복해서 주말에는 잠만 잤다.

뭐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아도,

뭐 대단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그냥 내 생활을 열정적으로 가꾸자는 마음가짐이 해이해진 정도를 넘어 와해돼 버렸다.     

사춘기를 다시 겪는 것 마냥 평온하다가도 울컥 눈물이 차오르고 웃다가도 분노에 휩싸였다. 그렇지만 내 하잘 것 없는 감정기복은 ‘그 일’ 자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실은 어떤 감정이란 것에 휘둘리는 나 자신이 밉기도 했다. 그럴 자격조차 없이 느껴졌다. 어떤 감정도, 그저 죄책감을 피하고자 하는 자기연민처럼 느껴졌다.     


올 3월, 내 친구 K가 세상을 떠났다. 그 어떤 따뜻한 수식어도 붙일 수 없는 그런 죽음이었다. 처음 구한 자취방에서 그 애는 홀로 떠났다. 함께 이삿짐을 옮기고 가구를 조립했던, 잔뜩 설레하며 인테리어 어플에서 산 물건들을 채우고 예쁘게 꾸몄던 그 방에서.


감각이 좋은 친구였다. 처음 꾸민 방인데도 사진을 찍어 올리자 인테리어 관련 계정에서 사진을 올리고 태그해도 되겠냐는 메시지가 왔었다. 그렇게 인테리어 계정에 올라간 그 애의 방 사진은 좋아요를 수천 개 받았었다. 하지만 그 애의 방을 엿본 수천 명 중 누구도, 그 애의 마지막에 좋아요를 눌러주진 못할 것이다.

k가 죽은 후 그 인테리어 계정에 들어가서 그 방 사진을 다시 찾아보려 했었다. 하지만 하루에서 여러개의 사진이 올라오는 계정이라 도저히 사진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계정에 올라온 수많은 예쁜 방들 중엔,
내 친구의 방과 같은 결말을 맞은 방이 몇 개나 될까? 

분명히 내친구의 방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세련된 색감의 필터가 덧씌워진 예쁘장한 원룸 사진들은 그 방에 살아 숨쉬는 고통 중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행복하고 싶은 사람은 커튼을 달고 가구를 채워 방을 꾸민다. 

행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완전히 잃은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행복하기 위해 방을 꾸밀 수 있는 인간은 불행하기 때문에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 이 두 행위의 실행력은 같은 무게다.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자 시도하는 사람은 더 열심히 잘 살고자 발버둥칠 수도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원망스러웠다. 

세상에 자살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게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친구의 죽음은 타살이었다. 세상이 그 애를 죽였다. 그리고 그 애를 죽인 냉혹한 세상엔 나 역시 포함되어 있다. 

죽기 몇 주 전 그 애는 자살시도를 했고, 죽지 않았다. 소식을 전해듣고 반차를 쓰고 달려가야 하나 했는데, 고민을 거듭하다 가지 않았다. 일차적인 이유는 다른 친구가 이미 그 애 곁에 가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날 내가 그애에게 가지 않은 이유는 사실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 애가 왜 힘든지 너무나 잘 알았다. 일터를 비롯한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현실의 짐들. 당장 술 한잔 같이 마시고 잊을 수는 있었다. 정신차리고 열심히 일해, 다음달부터는 저축도 더 많이 해, 잔소리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도 다른 친구들도 이미 많이 했었다. 그런 것들이 별 소용이 없다는 건 잘 알았다. 나는 그 애보다 훨씬 운이 좋았기 때문에 사실 잔소리를 할 자격도 없었다. 많은 불행이 그러하듯 그 애의 불행도 그 애 탓이 아니었다. 좀 더 좋은 조건에서 레이스를 시작하지 못했다는, 철저하게 ‘불운’에서 기반한 불행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그 애의 불행 자체가 사실은 좀 지긋지긋했다.     


일이 벌어지고 한동안은 정신이 없었다. 죽음을 둘러싼 현실적인 일 처리를 친구들이 머리를 맞대고 처리했기 때문이다. 나는 별로 도움이 되는 멤버는 아니었으나, 그 애의 죽음을 둘러싼 일들에 온 정신을 쏟았다. 그러다보면 마음이 덜 아팠다. 하지만 온갖 잡스럽고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하고 한숨 쉬지 않을 때는 문득문득 감당하기 힘든 감정이 밀려왔다.

평소와 똑같은 출근 길에, 재미있는 영화를 보다가, 말도 안되는 순간에 자꾸만 맥락없는 울음이 터졌다.     

유족의 뜻에 따라 장례는 치르지 않았다. 대신 병원에서 화장터까지 그 애를 아끼던 모두가 함께 했다. 누군가는 울면서 또 누군가는 멍한 표정으로, 함께 먹고 마시고 떠들던 몸이 한 줌의 재가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k를 보낸후에도 한동안 정신없이 지냈다. 화장터 안치를 비롯해 남은 문제 처리를 하는 친구에게 소식을 전해듣고, 궁금해하고, 이런저런 참견을 하며 지냈다. 서울에서 4시간 걸리는 화장터에 친구들과 방문했다. 그 김에 그애의 고향인 그 지역에서 하룻밤 자고 오기도 했다. 49재날에는 무려 셋이나 되는 부처님 앞에서 절을 했고 저녁엔 그 핑계로 술도 마셨다. 

-사후세계라는 게 정말 있으면 좋겠어.

-그러게. 거기서 다시 만나고 싶다.

-부처님이 셋이나 있었으니까 분명 극락에 갔을거야.

30줄 성인들이 모여 유치원 때나 진지하게 임했을 법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일이 많아졌다. 그 애가 등장하는 묘한 꿈을 꾸는 일도 많았다. 어떤 친구는 오토바이를 타는데 그 애가 뒤에 함께 탄 것마냥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고도 했다. 

-이제 좋은 곳에 가겠지?

-근데 보나마나 저기 앉아서 가기 싫어, 이러고 있을거 같아.
-안돼. 이젠 정말 가야돼. 49재도 잘 치렀으니 이제 정말 좋은 데 가!
-이제 우리 헤어지고, 한 80년 뒤에 다시 만나. 우린 장수할 거니까.
-저승가서 다시 보면 지 혼자 탱탱하니 젊겠네. 얄미워.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 애를 보내주기 싫은 건 우리였으니까. 

이제는 정말로 놓아주려 한다. 이미 떠난 그 애가 아니라 그 애를 떠나보낸 자리에 엉겨붙은 괴물같은 감정들을 이제는 정말 놓아줄 테다.


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그 애의 처음이자 마지막 방이었던 그 예쁘장한 공간을 떠올린다. 1층에 위치한 그 방의 작은 창문에서는 풍성한 연녹색 나뭇잎들이 보였다. 결코 원목은 아니지만 색감이 깊은 원목무늬 시트지의 합판 옷장이 있었고, 싱글 침대와 티비 하나, 접이식 테이블이 있었다. 침대와 그다지 멀지 않은 작은 싱크대에서 무언가 다듬고 있는 k의 뒷모습을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깨끗한 새 방, 새롭게 펼쳐질 아기자기하고 근면한 삶. 그 때의 그 방은 희망과 설렘의 방이었다. 

k의 마지막 방. 나는 그 방의 모습을 그렇게 기억하고 싶다. 실현되지 못한 작은 꿈들을 꼭꼭 접어 가득 채워둔 예쁜 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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