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등산, 북한산 백운대 탐방지원센터 코스
4,5월 내내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해나고 시간날 때마다 북한산 자락길을 찾았다. 흐린날의 촉촉하고 단아한 산, 맑은 날의 반짝이는 산. 매일매일 다른 매력으로 나를 홀렸다. 그러나 산의 가장 큰 매력은 날씨와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내가 존재하기 전에도 이 산이 있었고 또 내가 죽어도 산은 이 자리에 그대로 있을 거라는 것, 그게 내게는 가장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산을 사랑하기 전까지 내가 애착을 가졌던 공간들은 다 소녀시절처럼 혹은 연애 초반의 열정처럼 아주 매력적이었지만 언젠가는 끝난다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먼지 날리는 책장마다 한 시절들을 품고 있던 오래된 헌책방, 주인의 취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조그만 카페처럼 자주 다니는 장소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나가면서 눈으로만 훑는 길거리의 빈티지 옷가게나 단 한번도 방문하지 않은 술집의 유리창을 통해 보는 벽면의 오래된 포스터 따위에 애착을 가질 때도 있었다. 한 때의 반짝이는 순간들이 켜켜이 쌓인 풍경들을 나는 좋아했다. 그러나 산은 지금까지 내가 좋아했던 공간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숨이 턱까지 들이찼을 때 만나게 된 풍경이 내 존재보다 오래되었고 더 오래 지속될 거라는 사실. 그 풍경에 넋을 잃고 숨을 몰아쉬는 나는 거대한 시간의 흐름에 뒤섞여 산의 일부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북한산 자락길을 넘어 진짜 등산다운 등산을 시작하게 된건 다 C언니 덕분이다.
업계에서 가장 친한 사람중 한 명이자 내 인생이 힘들 때 많은 위로를 주었던 C언니는 내가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연 중 하나다. 내가 북한산 자락길을 다니게 된 시점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녀의 수많은 취미 중 하나로 등산이 추가되었다. 참고로 C언니는 무슨 취미를 하나 했다하면 전문가의 경지에 이르는 사람인데(캔들, 꽃꽂이, 사진 등등) 그러면서도 끝없이 취미를 늘려나가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자락길이 너무 좋아서 한 번쯤은 제대로된 등산을 해보고도 싶어."
지나가듯 했던 말이 어느 토요일의 등산 약속으로 발전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츄르야, 이거 완전 짧은 초보 코스래."
C언니가 블로그에서 찾았다는 북한산의 어느 코스를 보여주었다. 올라가는 시간 1시간에서 한 시간 반, 올라가서 만나는 풍경은 더할 나위 없는 절경, 블로거 중 어떤 레깅스 입은 여학생은 운동화 신고도 그냥 올라갔음. 오 이정도면 저질 체력 끝판왕인 나도 해볼 만 하겠는걸?
그렇게 6월 첫 주의 토요일, 나는 성인이 된 후의 첫 등산으로 '북한산 백운대 코스'를 오르게 되었다. 운동화로도 가는 코스라 들었으나 난 저질 체력이니 혹시나 몰라 쿠X에서 3만원대의 등산화를 사신고 무작정 갔다. 그 등산화조차 한 치수 크게 사야한다는 걸 몰라 정 사이즈로 샀었다.
"뭐지 나 벌써 엄청 힘든데?"
북한산 우이역에서 백운대 탐방지원센터까지의 거리는 약 2km의 오르막길이었다. 땡볕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그 길 가는데만 한시간쯤 걸렸다. 백운대 탐방지원센터에서 나는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래도 이제 1시간 반이면 오른다니까 한번 가보자, 기왕 왔으니 끝을 보고 가야지!"
그 뒤로는 말 같은 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흙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고 온통 회색 바위길에 오르막길인데다 바위가 없으면 북한산 자락길 가는 계단과는 비교되징 않는 엄청난 계단이 나타났다.
"잠깐만 잠깐만 조금만 쉬자."
"나 물 좀 마실게 잠깐만 미안."
"초보코스...? 헉헉....(원망의 눈빛)"
이 세 가지 대사만을 반복하며 끝도 없는 길을 올랐다. 두시간 쯤 오르고 나니 또다른 난관이 나타났다.
태어나 한번도 본적 없는 기상천외한 바위 낭떠러지 길이 나타난 것이다.
"저거...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곳 맞아...?"
그런데 그 말을 할 때는 이미엄청난 인파의 사람이 우리를 제치고 척척 나아가 그 무서운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언니... 내 인생에 이렇게 죽음과 가까워본 적은 처음이야..."
"아악!!! 아아아악!!!!"
소리를 지르다보니 어느 순간 태극기가 보였다. 정상석의 태극기를 찍겠다고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있었다.
나는 정상석 직전까지 갔다가 온갖 포즈와 컨셉으로 사진을 찍어대는 여러무리의 인스타그래머들을 기다리지 못하고 정상석 아래 넙적한 바위로 내려왔다.
그제야 너무 힘든 나머지 눈에 들어오지 않던 풍경이 보였다.
장관이었다.
거대한 산의 굴곡들. 점처럼 작아진 내가 사는 도시. 심장까지 녹색으로 물들어버릴 것 같은 겹겹의 녹음.
눈물이 조금 났다.
손은 퉁퉁불어 손가락이 두배가 됐고, 정사이즈 등산화안에서 불어난 발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도 그저 좋았다.
하산 후 냉면을 먹는데 창밖으로 북한산이 보였다. 까마득한 북한산 꼭대기를 가리키며 언니가 말했다.
"저기가 우리가 올라간데야."
"에이 설마..."
나는 설마 농담일거라 생각하고 웃었다. 그런데 언니는 딱히 농담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진짜로...?"
언니가 가리킨 곳은 아무리 봐도 너무 높아보였다.
혹시 백운대라는게 북한산의 정상은 아니겠지?
스마트폰에 '백운대 북한산 정상'을 입력하면서도 나는 나의 의심이 진실이 아닐 거라고 믿었다.
검색해보니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몇 개의 키워드가 보였다.
백운대, 북한산 정상으로 가는 최단 코스, 서울에서 가장 높은 산.
그러니까 나는 서울에서 가장 높은 산의 무려 정상을 올랐던 거였다. 솔직히 나는 내 인생에 그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집에 와서는 이틀 동안 근육통에 시달렸지만 묘한 자신감이 생겼다.
매주 토요일에는 제대로된 등산을 한번 해봐야겠다. 아침부터 오르면 이른 오후에 집에 오니 주말을 더 즐길 수도 있고 좋잖아.
이렇게 결심하며 달력의 그 날 날짜에 '북한산 백운대' 여섯 글자를 적어 넣었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낸 듯한 뿌듯함이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