쌩초보 꼬물이의 혼산 도전기
내 인생 첫 등산 이후, 은근슬쩍 C언니가 내 등산 스승이 되어주지 않을까 기대를 했다. 같은 초보자 입장이긴 했지만 나보다 등산 경험도 많아 보이고,(족두리봉이니 뭐니 하는 이름을 많이 알았다.) 비싼 등산화도 덜컥 사길래 계속 할 줄 알았다. 아쉽게도 그 후로 C언니는 '폭염 등산 휴식기'에 들어갔고, 결국 언니와는 한 번 밖에 등산을 함께하지 못했다.
“지난 번에 내가 너무 어려운 코스 데려간 것 같아. 이번엔 쉬운데 가자.”
언니의 말에 내심 ‘어려운 곳도 좋은데...’ 싶었지만 쉬운 산은 어떨지 또 궁금해서 따라가기로 했다. 그렇게 봉화산에 가게 되었다. 봉화산은 봉화산역과 이어져 있는 낮은 산으로, 공원처럼 꾸며져 있었다. 만만하다는 후기를 봐서 만만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심하게 만만했다. 오며 가며 역에서 봉화산 등산로까지 오는 길이 더 힘들었을 정도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이다. 땡볕 때문에 등산로까지 오고 가는 길이 더 힘들었다.)
정상석에서 언니와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데 운동 겸 올라온 동네 할머니들이 ‘뭐하는 거냐 쟤들은’ 하는 눈빛으로 빤히 쳐다봤다. 역까지 걸어오는 동안 지난 주에 들렀던 북한산 백운대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정도는 되어야 등산 아닌가?
아쉬움을 삼키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답이 나왔다. 시간은 오후 한시, 약속 없음. 등산화와 장갑 착용중. 혼자 백운대에 가기에 이보다 완벽한 때는 없었다.
북한산 우이역에서 내려 생수를 두병 사며 각오를 다졌다. 우이역에서 백운대 탐방지원센터까지 가는 길은 역시나 덥고 힘들었지만 한번 겪어봐서 그런지 지난 주 보다는 나았다. 탐방센터 앞 카페에서 레모네이드를 한잔 사먹으니 다시 힘이 났다.
이번엔 나 혼자니 실컷 쉬고 물도 많이 마시면서 올라가야지.
그렇게 결심하고 수시로 쉬며 백운대를 올랐는데 이상하게 언니를 억지로 따라가던 지난번보다 더 힘들었다. 그 때는 몰랐던 이유 때문이다. 등산 중 초반 30분동안 심장이 예열되며 호흡 가능한 공기가 늘어나는데 너무 쉬어버리면 다시 평상시의 상태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걸 모르고 실컷 쉬며 올라가면 덜 힘들겠거니 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앞서 가고, 내 뒤에 남아있는 사람은 어떻게 남들은 허리가 굽어 걷지도 못하는 저 연세에 산을 오르실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백살은 되신 것 같은 백발 할아버지 뿐이었다. (지금은 그 할아버지 같은 노인이 되는 게 내 장래희망이다.)
정상 인근 마당바위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혼자 온 등산객은 나 뿐이었고 대부분 무리를 지어 도시락을 까먹고 있었다. 어떻게 이 힘든 곳을 오르고도 다들 기운이 넘치는 걸까? 웅성웅성 귓가를 스쳐나가는 수십명의 대화 소리를 들으며 의문에 잠겼다. 압도적인 풍경을 보며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에너지 가득한 목소리들 속에 있으니 기운이 쭉쭉 빠졌다. 한 편으로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나눌 사람이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나 혼자 이 힘든 등산을 해냈는데, 정상에 왔으니 마냥 좋아야 하는데, 나만 빼고 시끄러운 인파 속에서 한없이 외로웠다.
오르는 데 세 시간이 걸렸는데, 내려오는 데는 한 시간이 걸렸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겨우 하산하니 손이 엄청나게 부어 있었다. 패잔병처럼 엉거주춤 탐방센터 주변을 맴도는데 택시 아저씨가 저 멀리서 내게 손짓을 했다.
거기 아가씨 택시타고 가요. 한 명 남았어.
홀린 듯이 다가가니 택시 뒷자리에 전형적인 중년 등산객 세 분이 먼저 타계셨다. 나는 기사아저씨의 옆자리에 탔다. 안그래도 역까지 가는 길이 이만저만 걱정되는게 아니었기에 너무 기뻤다. 택시아저씨와 대화하며 우이역 어느 카페 앞에 줄을 서있으면 올라갈 때도 등산로까지 택시를 탈 수 있다는 꿀팁도 얻었다.
그렇게 나의 첫 혼산은 별 탈없이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마당바위에서 마주했던 짙은 외로움이 한 끝 아쉬움으로 남았다.
다음에는 어떻게든 일행을 구해봐야지. 이를 꽉 깨물고 결심했다. 그러나 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처럼, 인생은 도무지 예상할 수가 없으며 절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결국 다음 등산도 혼자 가게 되었다. 가족들과 차를 빌려 강화도에 놀러가기로 했었는데, ‘토요일은 등산을 한다’고 결심을 한 터라 갑자기 가기가 싫어졌다.
“난 다음에 가면 안될까?”
은근슬쩍 빠져나가려는데 엄마가 미끼를 던졌다.
“강화도에 유명한 산 있는 거 알아? 마니산이라고. 넌 등산해.”
마니산, 마니산이라고?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엄마가 던진 미끼를 기다렸다는 듯 덥썩 물었다.
생전 처음 가보는 산을 혼자 가겠다고 결심하니 겁이 덜컥 났다. 가이드북을 보며 열심히 코스를 익혔다. 함허동천 캠핑장에서 마니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코스였는데 종이가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줄을 쳐가며 열심히 봤다. 길을 잃을까 걱정이 돼 복사본도 등산용 힙색에 챙겨 넣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했음에도 혼자서 하는 등산은 쉽지 않았다. 가이드북대로 가고 있는데도 한 백 번 정도 ‘이 길이 맞는 건가’ ‘이게 길은 맞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냥 갈림길이라는 데서 가라는 쪽 가고, 그 외엔 끝없이 오르기만 하면 되는데도 그랬다. 이상하게 그 길은 사람이 없었는데, 멀리서 남자 등산객 혼자 다가올 때면 도망가고 싶을 만큼 무서웠다. 물론 내가 겁먹은 걸 눈치챘다면 그 분들은 억울하겠지만, 인터넷에 '등산객 살인'을 검색하면 살인범이 죄다 남자고 피해자는 주로 혼자 산을 타던 여성인데 어쩌겠는가. 이렇게는 더는 못하겠다. 어떻게든 동행을 구하자. 가는 내내 수시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안심했다를 반복하며 굳게 결심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정상은 찍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위대한 가이드북이다. 나 같은 길치가 혼자 정상까지 갈 수 있게 해주다니. 정상에는 내가 갔던 코스보다 사람이 많아서 마스크를 더 단단히 썼다. 사진 찍는 걸 안 좋아해서 정상석만 찍고 떠나려고 했는데 뒤에 계시던 아저씨가 친절하게도 전신샷을 찍어주셨다.
마니산은 그 당시의 내 체력에 딱 맞는 산이었다. 적당히 힘들어 심장박동이 제대로 느껴지면서도 너무 힘들어 손이 붓거나 하진 않았다. 날이 흐려서 바다는 보이지 않았지만 베일이 덮인 듯 신비로운 풍경이 매력 있었다.
다음 주엔 무슨 산에 갈까?
그렇게 내게는 한 주를 버티게 해주는 행복한 고민이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