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매일을 설레게 하는 쥐똥만큼의 공부와 운동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100일이라는 기간에 집착한다. 시작하는 연인들도 100일을 기념하고, 100일 기간을 잡고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어쩌면 적당히 긴 시간이어서일지도 모르겠다. 100일이란 한 해의 1/4에 열흘을 더한 것이니 결코 짧은 시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지겨워 죽을만큼의 긴 시간이냐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 그러면서도 ‘100’이라는 숫자가 주는 꽉 찬 느낌이 있으니 어쩐지 뿌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100일’이란 굉장히 상투적인 마케팅 수단이기도 하다. ‘100일 필사, 100일 다이어리, 100일 공부, 100일 명상’ 등등. 그리고 나 역시 이 뻔한 마케팅에 혹해 홀라당 돈을 써버린 사람 중 하나다.
100일 짜리 스터디 플래너를 사서 매일매일 약간의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지 이제 12일 되었다. 의지박약까지는 아닌데, 계획을 너무 빡빡하고 세워놓고는 뭐 하나만 어긋나도 모두 놓아버리는 성격 탓에, 조금씩이라도 매일 뭔가 하자는 마음에서 100일짜리 플래너로 샀다.
스터디 플래너가 주 목적인 플래너라 나와 조금 안맞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내 멋대로 변형해 쓴다. 이를 테면 우측의 '타임 테이블' 부분을 나는 '감사한 일 리스트'로 바꾸어 무언가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 때마다 적고 있다.
겨우 12일인데도 그 사이 너무 피곤해서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도 있었고, 호르몬 때문인지 별것 아닌 일로 분노에 휩싸여 나쁜 감정에 한껏 몰두한 날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기록을 지속하는 날들동안 나는 그 전보다 훨씬 평온했고 때로는 굉장히 행복할 때도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느꼈던 행복감은 내게 굉장히 특별했는데, 그 이유는 이 행복이 타인이나 외부 상황이 가져다 준 행복이 아니라, 오로지 내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마트에서 사온 과일의 달콤한 맛과 내가 물을 주고 돌보아 수확한 유기농 과일의 달콤한 맛이 주는 의미가 다른 것처럼, 똑같은 강도의 행복감이라도 외부에서 온 행복과 내 안에서 만들어낸 행복이 갖는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스스로 행복할 때 나는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신선한 동력을 얻는다.
오늘 기상시간은 새벽 다섯 시. 그저께 잠을 4시간밖에 못자서인지 어제 많이 잤는데도 아침에 눈을 뜨니 새벽 기상이고 공부고 모두 포기하고 싶을 만큼 피곤했다. 하지만 플래너에 무언가 쓰는 소소한 기쁨을 얻기 위해 억지로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찬 물 한 잔을 쭉 들이키고 갓 끓여내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어가며 몇 모금 마시니 죽을 것 같은 피곤함이 조금 가셨다. 기지개를 켠 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에 연필을 쥐고 보캐브러리 책을 펼쳐 오늘 공부할 페이지의 단어들 중 ‘지긋지긋할 정도로 너무 잘 아는 단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단어는 아는 단어든 모르는 단어든 모두 표시하며 눈에 익혔다. 그러고 나니 공부할 준비가 된 것 같아 연필을 놓고 펜을 들었다. 그리고 플래너의 맨 위 빈 칸에 몇 문장을 적었다.
“아침에 피곤함을 극복하고 책상에 앉았다. 기상 시간은 5시. 오늘 하루도 제대로 시작해서 기쁘다. 활기찬 날도 그렇지 않은 날도 나만의 루틴이 있어 나는 하루를 차분하고 풍성하게 시작할 수 있다. 쌓여가는 하루하루가 내게는 참 소중하다.”
이렇게 적고나니 폭신하고 달콤한 감각이 가슴께부터 우러나와 손끝까지 퍼져나갔다.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정말 내 하루를 야무지게 잘 시작한 것 같아 나 자신이 조금 더 좋아졌다.
사실 내가 대단하게 플래너까지 쓰면서 아침에 하는 공부는 양으로 치면 정말 적다. 제대로 공부에 몰두하던 학생 시절의 나라면 쉬는 시간에 헤치웠을 수준인지도 모른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밝혀보자면 아래와 같다.
토익 리딩 문제 10문제~20문제 풀고 틀린 문제가 있으면 오답 풀이
영어 문법 관련 교재 3-4 페이지 공부(눈으로 쓱 훑고 생소한 부분이 있으면 공책에 배껴써보기, 관련 문제 2-3개를 풀어보는 정도다)
영어 단어 30개 정도 단어장에 옮겨 쓰고 눈으로 공부
매일매일 부담 없이 즐기며 하기 위해 일부러 적은 양으로 설정했는데 후회는 없다. 피곤하거나 하기 싫은 날에는 저것 조차 힘이 들어 한 개 정도 안하기도 했었다. 하루에 모르는 영어 단어를 한 개만 익혀도 1년이면 365개가 되니까, 아예 놓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내 삶에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내가 새벽에 공부를 하는 이유는 대단하게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나마 영어가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해온 만만한 공부여서다. 새벽 기상과 매일의 공부는 내 정신건강을 위한 자기계발이기 때문이다. 설마하니 나중에 영어권 외국인과 데이트를 할 일이 생긴다 해도 토익에 나오는 업무 관련 용어들 따위를 쓸 일이야 있겠는가.
아침에 하는 일은 아니지만 플래너에 적는 게 두 가지 더 있다. 스쿼트 100개와 브런치 글쓰기다. 스쿼트 100개는 운동을 꾸준히 즐겨하는 사람들에게는 워밍업 정도의 가벼운 운동이다. 그래도 하루의 절반 이상을 앉아 있는데다 숨쉬기조차 힘들어 ‘정신건강 관리’를 해야하는 나같은 인간에게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빡센 운동이다. 하는데는 5분도 안 걸리지만 마치고 나면 다리를 떨면서 개처럼 헥헥댄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가 많은데 그럴 때 5분동안 스쿼트를 하고 나면(이조차 중간에 2,3번 쉬는 타임을 갖는다) 나머지 한 가지 일인 글쓰기도 하고 자야지 하고 책상에 앉게 된다. 물론 ‘매일매일 1편씩 써서 올리겠어!’하는 다짐을 완벽히 지키지는 못했다. 그래도 평균 이틀에 한 편씩은 꼭 올리게 되어 계정을 만들어놓고 한동안 방치하던 과거에 비해서는 업로드 빈도 수가 확실히 높아졌다.
100일 플래너를 다 쓸 때까지 이제 87일 남았다. 100일동안 약간의 영어공부와 글쓰기, 쥐똥만큼의 운동을 한다고 해서 내 인생이 크게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100일이 지나면 스스로에게 무언가 선물을 해줄 예정이다. 평소에 선뜻 사지 못하는 쓸데없고 예쁜 걸 사야지, 아직 100일은 한참 남았지만 행복한 고민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