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공원, 니데크다리 그리고 아레강
프랑스에서의 좋은 추억을 가슴에 담고 스위스로 갑니다. 이번 여행은 날씨가 다했습니다. 유럽은 날씨가 변덕스럽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맑은 날씨가 함께했습니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눈을 좀 붙이려고 했는데, 맑은 날씨와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서 잠들지 못했습니다. 눈감는 시간조차 아까웠습니다. 설렘을 가득 안고 달려간 곳은 스위스의 수도 ‘베른’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베른은요. 쓰레기 관리가 정말 엄격한 나라입니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렸다가는 높은 벌금을 낼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여행지에서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면 안 되겠지만요. 그만큼 거리가 청결합니다. 주민들도 분리수거에 적극 협조하는 깨끗한 도시죠. 실수로라도 쓰레기를 흘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베른에 발을 디뎠습니다.
베른은 스위스의 수도입니다. 하지만 제가 경험한 베른은 수도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수도 분위기와 사뭇 달랐습니다. 서울은 사람이 붐비고 혼잡합니다. 대기업 본사가 모여 있고 갖은 인프라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베른은 조용하고 여유로운 느낌이었습니다. 아름다움은 기본이었고요. 차분함과 낭만이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흥미로운 베른을 한눈에 내려다보기 위해 대표 관광지 ‘장미공원’으로 향했습니다. 공원 왼편엔 장미 꽃밭이 있습니다. 아쉽게도 장미가 피는 기간이 아니라 흙만 보였습니다. 개화시기에 맞춰 이곳을 방문하면 로맨틱함까지 더해질 것 같습니다. 장미 없는 장미공원이었지만 건너편에 펼쳐진 베른 모습에서 도시에 핀 장미를 볼 수 있었습니다. 붉은 지붕을 한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빼곡히 도시를 메운 건물은 모든 날이 개화일이었습니다. 카푸치노 한 잔을 들고 벤치에 앉아 사색에 빠졌습니다.
장미공원에서 바라본 베른은 마치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게임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경치였습니다. 사냥터에 다녀온 캐릭터가 무기와 갑옷을 수리하고 체력회복 드링크를 사는 곳 같았습니다. 어떤 몬스터도 침범하지 못하고 사람들 간 대결도 불가능한 평화로운 동네였습니다. 문득 저도 게임 속에 들어온 플레이어 중 하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장이란 사냥터에서 많은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보스 몬스터가 휘두른 무기에 몸과 마음이 상했습니다. 평화로운 베른에 머물며 재정비하고 체력을 회복하여 새로운 임무를 수행해 나갈 힘을 얻었습니다. 베른 경치는 저에게 새로운 희망과 힘을 불어넣었습니다.
상상 속에서 로그아웃하고 공원에서 내려왔습니다. 베른의 자랑, 니데크다리를 건너며 강을 내려다봤습니다. 말발굽 형태로 도시를 감싸며 흐르는 아레강은 옥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깨끗한지 멀리 떨어진 곳의 바닥도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강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주변을 산책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여름엔 발을 담그거나 수영도 할 수 있다고 해요. 8년째 수영을 하고 있는 저로서는 욕심나는 환경이었습니다. 물안경을 끼지 않아도 물속이 다 보일 것 같습니다.
가장 부러운 사람은 창문에 해먹을 달아서 누워있는 청년이었습니다. 창문을 열면 자신의 방에서 청량한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말 그대로 ‘리버뷰’였습니다. 그는 선글라스를 쓰고 휴대폰을 보던 중 옆에 놓인 병맥주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세상 걱정 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집에서 강이 보이니까 부자겠죠? 역시 여유로움은 지갑에서 나옵니다. 그의 모습을 부러워하며 한참을 바라보았는데, 눈이 마주쳐서 황급히 다리를 건너갔습니다.
아름다운 풍경, 여유로운 분위기, 친절한 스위스 사람들.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마음에 들었습니다. 단 한 가지 아쉬웠던 건 ‘물가’였습니다. 스위스는 폭력적인 물가로 유명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맛집인 맥도날드가 나타나서 그곳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역시 맥도날드는 빅맥입니다. 키오스크에서 선택하니 가격이 6.7프랑이었습니다. 한국 돈으로 만원 정도 되는 금액입니다. 더블빅맥은 만 삼천 원 가까이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세트가 아니라 단품이라는 것입니다. 놀랍도록 높은 가격이었습니다. 빅맥은 한국에서 먹기로 하고 가게를 나왔습니다. 돈만 많으면 정말 살기 좋은 스위스. 이번 인생은 여행으로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무서운 물가를 피해 선택한 메뉴는 Meet Point ‘케밥’입니다. 미리 봐둔 Meret Oppenheim Fountain 벤치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유럽 감성을 즐기기 위해서죠. 케밥 금액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13프랑. 이 만원 정도였습니다. 맥도날드에서 놀란 마음을 달래러 왔는데 더 비쌌습니다. 장미공원부터 시작해 베른 곳곳을 누볐더니 허기 가져 더 이상 안될 것 같았습니다. 점심은 케밥을 선택했습니다.
비싼 값을 하는 걸까요? 이 케밥, 크기가 정말 컸습니다. 성인 여성 얼굴을 가릴 정도였습니다. 소식하는 분들은 하나를 사서 둘이 나눠 먹어도 충분합니다. 맛도 대박입니다. 쫀득한 토르티야 속 양고기와 다양한 야채가 가득했어요. 짭조름하면서 매콤한 소스가 입맛을 돋우었습니다. 많이 먹었는데도 반 이상 남아있어서 신기했답니다. 케밥이 계속 자라는 느낌이었습니다.
햇살 좋은 벤치엔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습니다. 커피를 마시거나 맥주 한 잔을 즐기는 사람도 있었고요. 저처럼 테이크 아웃으로 점심을 먹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스위스의 야외문화가 낭만적이었습니다. 그때, 피자 가게에서 남자 7명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모두 다 한 손엔 피자 한 판 씩 들고 있었죠. 제가 앉은 벤치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각자 들고 있던 피자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유럽사람들은 식당에 가면 1인 1 메뉴를 주문합니다. 피자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가볍게 한 판을 비운 사람들은 완판 세리머니로 담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케밥 하나도 다 못 먹고 배불러하던 제 모습과 비교됐습니다. 대식가 앞에서 기죽은 저는 간접흡연을 피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장미공원에서 내려다봤던 빨간 지붕 건물 숲으로 들어왔습니다. 지붕에 가려져있던 골목이 드러났습니다. 생소한 건물 분위기에 매료되어 휴대폰 카메라를 자주 들어 올렸습니다. 길에 설치된 분수대는 독특한 모습이었습니다. 괴물이 사람을 잡아먹는 모습도 있었고,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악마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분수 주변엔 기념 촬영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한 가족이 저에게 사진 찍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베른의 맑은 거리처럼 모두 화사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들의 추억을 카메라에 담아주는 것을 끝으로 베른 시내를 빠져나왔습니다.
떠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서글픈 마음을 달래려 아레강을 다시 한번 내려다봤지만 아쉬움은 깊어만 갔습니다. 앞으로의 삶이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평화롭고 무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베른에 머무른 짧은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이 정화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맑고 깨끗한 거리, 평화로운 아레강은 나쁜 기억을 밀어내고 깨끗한 기억을 심어주었습니다. 청정한 공기를 오래 간직하고 싶어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쉬고 떠나는 버스에 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