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소장 Apr 26. 2023

세상 이쁜 색깔은 여기 다 모였네, 인터라켄

툰호, 인터라켄 동네 산책 그리고 마트

 이동하는 버스에서 기절하듯 잠들었습니다. 처음 떠난 유럽 여행이라 시차적응하는 법도 모른 채, 고된 일정을 소화한 탓이죠. 지금까지 여행을 되돌아보니 강행군이기는 했습니다. 녹아버린 젤라또 마냥 의자에 퍼져 짧은 휴식을 보냈습니다. 단잠을 깨운 것은 버스 안을 가득 채운 감탄사였습니다. 놀라서 눈을 떠보니 다들 버스 창문에 붙어 동영상을 촬영했습니다. 환호성의 주인공은 ‘툰호’였습니다.

 어딜 봐도 끝없이 이어진 푸른 호수가 보였고요. 초록 들판이 호수 곁을 지켰습니다. 맑은 하늘 아래에는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이 호수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세상 이쁜 색깔은 여기 다 모아 놓은 듯했습니다. 유럽 여행은 잘 시간이 부족해질 수밖에 없나 봅니다. 밤에는 아름다운 야경, 이동하는 버스에서는 푸른 들판과 맑은 하늘. 그리고 이번에는 호수와 설산까지 펼쳐졌네요. 잠은 한국에 돌아가서 푹 자야겠습니다. 단잠보다 더 달콤한 스위스 풍경에 이끌려 저도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툰호 끝에는 숙소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점심이 조금 넘은 시간에 도착했습니다. 밥 먹기 애매한 시간이었습니다. 몇 시간 뒤면 저녁 먹을 시간이었거든요. 휴게소에서 챙겨 먹은 간식 덕분에 배고픔도 덜했습니다. 간단하게 사 먹기에는 물가가 무서웠습니다. 이곳은 스위스니까요. 저 같은 가난한 여행객은 레스토랑 식사가 부담스럽지요. 스위스에 오면 ‘대자연 앞에 겸손해지고, 물가 앞에 또 한 번 겸손해진다’던데 그 말이 맞습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 한국에서 챙겨 온 비상식량이 있습니다. 한국 최고의 음식 ‘컵라면’입니다. 캐리어에 있는 빨간 라면을 보기만 해도 칼칼한 맛이 느껴졌습니다. 뜨거운 물을 붓자 숙소가 매운 냄새로 가득 찼습니다. 스위스에서 한국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역시 한국 라면이 최고입니다. 그리운 고향의 맛으로 배를 채우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인터라켄은 사람을 멈추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려 했는데, 아름다운 잔디밭이 펼쳐졌습니다. 산책 나온 강아지가 뛰어놀았고요. 잔디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 멀리 하늘에 닿을 것 같은 알프스 산맥이 발길을 잡았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파리에서 유용하게 사용했던 돗자리를 펼쳤습니다. 술 한잔 해야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쿱 마켓(Coop Supermarket)으로 달려가 가장 저렴한 와인을 구매했습니다. 안주는 먹다 남은 과자와 맑은 공기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몇 병을 먹어도 취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와인을 마시려 고개를 들자 하늘엔 낙하산이 가득했습니다. 패러글라이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좌우로 나부끼는 사람, 창공을 휘저으며 빙글빙글 도는 사람 등 다양하게 하늘을 수놓았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패러글라이딩하는 걸로 시작합니다. 저는 놀이기구도 못 탑니다. 패러글라이딩 잘할 수 있을까요? 두려운 마음에 와인만 들이켰습니다.

 돗자리를 깔고 앉은 잔디밭은 패러글라이딩 착륙 지점입니다. 땅을 밟은 사람들은 폴짝폴짝 뛰며 감동을 온몸으로 표현했습니다. 재미있나 봅니다. 사람들 모습을 보고 살짝 기대도 했지만, 긴장도 됐습니다. 먹다 남은 와인을 잔디밭에 뿌리며 무사 착륙을 기원했습니다. 해가 조금씩 기울자 잔디에서 냉기가 올라왔습니다. 멀리 보이는 알프스 산맥도 추운 입김을 불어내는 것 같았습니다. 자리를 정리하고 숙소 주변을 걷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앉은자리는 깨끗하게 치웠습니다.

 숙소 뒤편 다리 위에서 아레강을 또 만났습니다. 베른부터 시작해 툰호를 지나 인터라켄에서도 아름다움을 선사했습니다. 맑은 강 위에는 오리 한 쌍이 여유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 친구들도 아름다움을 아는지 강 위에 한참을 떠있었습니다. 주변이 어둑해지자 다리 위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습니다. 스위스의 첫날을 환영하는 축하 행사 같았습니다. 불이 켜진 길은 맑은 호수와 어우러져 분위기를 더 했습니다.

 동네 마실을 끝내고 쿱 마켓으로 갔습니다. 저처럼 스위스 레스토랑 물가에 놀란 사람들에겐 쿱 마켓은 축복입니다. 피자, 파스타, 빵, 훈제 요리 등 완제품을 판매합니다. 7~8시쯤 되면 할인 스티커가 붙습니다. 운 좋으면 갓성비 음식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습니다. 잡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기회를 놓치면 안 되죠. 고민하는 순간 옆 사람이 채갑니다.

 인터라켄 살림꾼을 이겨내고 집어든 음식은 피자와 마카로니 파스타입니다. 두 음식 모두 완제품이라 숙소 게스트룸에 있는 전자레인지를 이용하면 조리 끝입니다. 아, 그리고 와인도 한 병 샀습니다. 잔디 공원에서 마셨는데 또 마십니다. 오늘 한 번 달려봐야겠습니다. 게스트룸은 벌써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다행히 구석자리가 비어있어 그곳에 음식과 와인을 내려놨습니다.

 마트 음식이지만 맛이 끝내줬습니다. 화이트 와인과 잘 어울려 안주로도 제격이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어눌한 한국어 발음이지만 당찬 목소리로 인사를 걸어왔습니다. 옆 테이블에 있던 한 커플이었습니다. 외국인에게서 듣는 한국어라 신기했고, 스위스에서 들으니 더 반가웠습니다. 이번에도 기초적인 영어지만 편의를 위해 한국어로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코리아에서 왔어요. 한국어 잘하시네요.”

 “우린 인도네시아에서 왔습니다. 블랙핑크도 알아요. 우리나라에서 유명합니다.”


 K-팝의 세계적 위상을 실감했습니다. 괜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한국 문화를 향유하는 두 사람에게 저도 인도네시아 유명인을 말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유일하게 아는 인물을 말하며 대화를 이었습니다.


 “저도 인도네시아 유명인을 압니다. 조코 위 도도. 제가 다닌 대학교에 인도네시아 유학생이 많아서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방문한 적 있습니다.”

 “오, 감사합니다. 저도 당신 나라의 대통령을 알고 있습니다. 그... 김.. 정..”

 “NO. NO. NO. 아니다. 난 대한민국에서 왔다.”

 저의 본적이 북쪽이 아님을 말하고 한바탕 웃었습니다. 한국 건배사를 묻는 인도네시아 커플에게 ‘건배’라고 알려주며 서로의 잔을 부딪혔습니다. 여행의 묘미는 낯선 환경에서 새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일상에서는 한정적인 만남을 이어갑니다. 만났던 사람만 만나고요. 했던 이야기만 하고 했던 것만 하죠. 여행에서 만난 사람은 일상에서 만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새롭고 다양한 이야기가 가능하죠. 게스트 룸에서 만난 인도네시아 친구들처럼 인종, 국적이 다르다면 더욱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관점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스트 룸 이용시간이 다됐다고 호텔 직원이 알렸습니다. 아쉽지만 인사를 하고 각자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낯선 곳에선 만난 새로운 친구들 덕분에 스위스 첫날을 웃으며 보냈습니다. 뜨거운 온수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습니다. 포근한 침대가 온몸을 빨아들였습니다. 맑은 아레강에 침잠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드디어 시차적응이 끝난 것 같습니다. 여행 중 처음으로 뒤척이지 않고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이전 05화 깨끗하고 맑은, 청정 도시 베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