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사유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소장 Mar 07. 2020

제발 10분만

5시 50분도 아니다. 6시 정각도 아니다. ‘6시 10분’이면 충분하다. 오후 6시, 퇴근 버튼을 누르지만 당당하게 일어나지 못한다. 상사들이 먼저 일어나거나, 가라고 말을 해야 퇴근하는 분위기다. 계약서엔 6시까지라고 나와있지만 떳떳하게 집에 갈 수 없다. 애꿎은 엑셀만 껐다 켰다 반복하다 6시 20분, 늦으면 30분쯤 회사를 탈출한다.

눈치를 무릅쓰고 먼저 나가거나, 상사가 일찍 퇴근하는 날은 퇴근 후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다. 겨우 ‘10분’이지만 하루가 바뀌고 내일이 새로워진다. 


사무실 밀집 지역에서 두세 정거장 떨어진 곳에 자리한 터라 출퇴근 시간이면 ‘지옥철’을 경험한다. 특히나 퇴근길 지옥철은 힘든 하루를 더욱 피곤하게 만든다. 6시 10분(정시 퇴근도 아니다), 평소 퇴근 시간보다 10분만 일찍 나간다면 넓고 쾌적한 지하철을 탈 수 있다. 가끔 앉아서 가는 경우도 있다. 늦게 마치는 날에는 꿈꾸지 못할 ‘소소한 행복’을 누린다.

여유롭게 환승역에 도착하면, 환승할 지하철이 곧 들어온다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기다릴 필요 없다. 계단을 걸어 내려와 다이렉트 환승을 한다. 역시나 사람들이 많이 없다. 지하철에서 책도 보고 글도 끄적인다. 10분의 힘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지하철 밖으로 나오면 마을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수영장으로 가는 버스다. 몸을 실으면 1~2분 뒤 곧장 출발한다. 마치 날 기다린 것 같다. 수영장에 도착하면 6시 40분이다. 7시 수업까지 20분 정도 남는다. 뜨끈한 온탕과 사우나를 오가며 여유를 즐긴다.

실제 사우나하는 사진을 올리려 했지만, 19금이라...

뜨겁게 달궈진 몸으로 물살을 가르면 힘든 것도 모른다. 7시 수업이 끝났지만 아직 뭔가 좀 모자란 기분이 든다. 샤워실로 가던 발길을 물속으로 돌린다. 7시부터 8시, 8시부터 9시까지 두 시간을 수영장에서 보낸다. 10분만 빠르면 건강한 두 시간을 얻을 수 있다. 

늦게 퇴근 한 날은 8시 수업에 들어간다. 지하철 칼환승은 꿈도 못 꾼다. 마을버스 배차시간도 어긋나서 정류장에 앉아 하릴없이 기다려야 한다. 사우나는 고사하고 허겁지겁 샤워만 끝내도 7시를 넘긴 시간이다. 수업 중 들어가면 선생님께 죄송하고, 다른 회원을 방해하는 것 같아 다음 수업에 들어간다. 고작 10분이 몰고 온 차이는 엄청나다.

물속에서 두 시간을 보내고 나면, 오늘 무슨 말을 들었고 어떤 힘든 일이 있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침대에 누우면 바로 기절한다. 스트레스받지 않는 방법 중 '안 좋은 일을 털어내는 것'도 있지만,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아무 걱정 없이 꿀잠을 잔다. 눈떠보면 출근할 시간이다. 전날 땀 흘리고 운동한 덕분에 개운한 아침을 맞이한다. 하루의 시작이 달라진다.


퇴근 후 내가 누린 많은 것들은 고작 10분 일찍 퇴근한 것으로부터 나왔다. 정시 퇴근도 아니었다. 최고의 복지는 정시 퇴근이라던데, 바라지도 않는다. 10분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그것도 힘든 것 같다. 언제쯤 눈치 보지 않고 퇴근하는 날이 올까? 오늘 도 난 ‘제발 10분만’ 일찍 끝나길 기도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C급 인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