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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소장 Mar 08. 2020

이런 날 집에 있으면 손해야

날씨가 너무 맑다. 이런 날 집에 있으면 손해 보는 기분이다. 전날 내린 비로 하늘에 있던 구름과 대기 중 미세먼지가 싹 씻겨 나갔나 보다. 없던 약속도 만들고 싶지만, 무서운 시기인 만큼 혼자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전망 좋은 카페에 앉아 바닐라라떼를 마시며 분위기 잡고 싶었다. 우수에 찬 눈빛으로 창 밖을 내다보다가 문득 무언가 생각 난 듯 볼펜을 잡고 끄적이는 모습을 상상했다. 확진자 동선이 공개되고 혹시 모를 감염에 대비해 그런 재수 없는 모습은 하지 않기로 했다.

비상식량 챙겨서 등산 출발!

사람 많은 곳은 피하고 탁 트인 곳에서 맑은 날을 만끽하고 싶었다. 행여 확진자가 지나갔더라도 세균이 바람에 날려 사라지는 곳이면 좋을 것 같았다. 이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곳은 ‘산’이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운동화 신고 가방 메고 뒷산으로 향했다. 근처 편의점에 들러 물 한 통과 집에서 챙겨 나온 초코칩을 가방에 욱여넣었다. 작년 가을쯤 등산했으니, 거의 반년 만에 오르는 산이었다.

비 온 다음날이라 땅이 질퍽일까 봐 걱정했지만, 걷기 좋은 땅이었다. 진흙도 별로 없고 고인물도 없었다. 가는 곳마다 맑은 하늘이 보였고, 따뜻한 햇살이 내리쬈다. 오래간만에 광합성을 하니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안녕 동백씨

‘올해 들어 가장 따뜻하다’는 기상청 말처럼 완연한 봄 날씨였다. 운동복에 플리스 겉옷만 입고 나왔는데 춥지 않았다. 이름 모를 나무엔 꽃봉오리도 있었고, 더러는 꽃도 활짝 피었다. 작년 내 마음을 흔들었던 ‘까멜리아 동백 씨’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20분쯤 걸었을까, 땀이 줄줄 나기 시작했다. 편의점에서 샀던 물을 꺼내 두 모금 마셨다. 오늘따라 물이 달콤했다.


맑은 날을 즐기며 쉬엄쉬엄 걷다 보니 ‘할딱 고개’ 입구에 도착했다. 경사가 가팔라 올라갈 때 숨이 ‘할딱할딱’ 넘어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길로 곧장 올라가면 정상이 나온다. 그만큼 경사가 높은 길이다. 이번 주 하체 운동을 게을리했다. 보충 운동을 위해 끝이 보이지 않는 할딱 고개에 도전했다.

할딱 고개 입구

허벅지가 불타고 엉덩이가 욱신거렸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위를 올려다봤다. 정상은 한 참 남아있었다. 스트레칭하며 다리를 푼 뒤 다시 올랐다. 오르는 만큼 ‘힙업’된다는 생각을 했다. 아찔한 뒤태를 기대하며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이윽고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나처럼 할딱 고개를 등반한 사람들이 앉아서 쉬는 소리였다. 맑은 하늘이 보였고 땀을 닦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드디어 할딱 고개를 넘어 정상에 도착했다. 평평한 돌 위에 앉아 초코칩을 먹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맑고 깨끗했다. 탁 트인 곳에서 맑은 날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었다. 초코칩보다 정상에서 들이마시는 공기가 더욱 달콤했다.

맑은 하늘 아래에서 전염병이 돌고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정상에선 내가 살고 있는 동네뿐만 아니라 부산 시내 전체가 훤히 다 보였다. 지금껏 봤던 부산의 모습 중 가장 아름다웠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미세먼지도 걷혀 맑은 날인데, 지금 이 곳에서 무서운 전염병이 돌고 있다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주변 사람과 맑은 날씨를 함께 하지 못해 마음 아팠다. 오늘의 맑은 하늘처럼 전염병이 깨끗이 사라지는 날이 오길 기도했다.

벤치 프레스도 있다. 그런데 오른쪽 사진에 있는 건 뭐 할 때 쓰는건가?

자리를 옮겨 약수터로 내려갔다. 철봉, 덤벨 등 운동기구를 이용해 체력증진에 힘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철저한 체력관리가 필수다. 코로나도 뚫지 못하는 강한 육체를 위해 턱걸이 2세트를 하고 약수를 시원하게 마셨다.

치유의 숲, 안쪽 사진은 찍지 못했다. 다음에 가면 꼭 찍어야겠다.

‘치유의 숲’이란 푯말을 보고 그쪽으로 향했다. 편백나무가 빼곡하게 심어진 길이다. 피톤치드가 듬뿍 나와서 삼림욕에 좋은 곳이라고 한다. 심신 건강에 도움된다는 말을 듣고 한 번 걸어봤다. 쭉 뻗은 나무가 많아서 숲 주변이 어둑어둑했다.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았다. 제주도 사려니 숲을 걸었던 적이 있는데, 그곳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가끔 생각이 많으면 ‘치유의 숲’을 찾아야겠다.

오늘 같은 날, 집에 있으면 손해 보는 것 같아 무작정 산을 올랐다. 10km 걸었고 시간은 2시간 30분쯤 된다. 맑은 하늘을 보며 마음이 맑아졌고, 건강도 챙길 수 있었던 하루였다. 문을 박차고 나왔지만 혹시나 하는 두려움에 마스크를 쓰고 등산했다. 맑은 공기를 필터 없이, 두려움 없이 마시는 날이 빨리 찾아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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