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한다고 하면 꼭 일 이야기를 꺼내요. 오늘 지시한 일은 어떻게 됐냐고요. 급한 일도 아니고 일정도 많이 남은 걸 알면서도요. 부하 직원이 먼저 가는 걸 아니꼽게 생각하는 거죠. 부장 눈치 때문에 퇴근길 내내 찝찝함이 가시질 않아요."
I의 직장 상사 별명은 스타크래프트 유닛인 '시즈탱크'다. 부하 직원을 갈구는 사거리가 광범위하고 자리를 잘 비우지 않아 붙여졌다. 구석자리에 앉은 시즈탱크 부장은 누가 딴짓을 하는지 매의 눈으로 감시한다. 그러다 잘못된 결재를 올리거나 성가신 행동을 하면 그 사람에게 포탄이 떨어진다. 부장이 시즈모드를 풀 때는 퇴근 시간이다. 집에 가는 것이 아니다. 슬그머니 일어나 담배를 챙겨 들고 사라진다.
“업무시간엔 죽치고 앉아있다가 퇴근시간만 되면 밖으로 나가요. 다른 팀은 퇴근하는데 우리 팀만 못 해요. 부장이 상사니까 인사는 해야 하잖아요. 올 때까지 기다려요. 칼퇴는 다른 팀만 해당하는 이야기예요.”
"그냥 가면 안 되나요? 굳이 기다렸다가 가야 한다니 눈치 주는 건가요?"
I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겪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날은 저녁 약속이 있었어요. 인사를 하지 않고 퇴근했죠. 문제는 다음 날이에요. 부장에게 아침 인사를 하는 순간 디자인 수정 사항이 있다며 업무가 내려왔어요. 가방 정리도 못하고 부랴부랴 작업을 시작했죠.”
I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부장은 급한 일이라며 재촉했다. I는 포격을 버티며 정신없이 일을 쳐냈다. 잠시 후 수정 시안을 부장에게 내밀었다. 시안을 받은 부장은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책상 구석에 놓았다.
“시안 수정은 헛된 일이었어요. 전날에 선배가 만든 디자인으로 발주를 넣었대요. 선배들이 말하길 인사 안 하고 가서 눈치 주는 거라고 했어요. 부장이 퇴근시간에 사라지는 일이 매번 반복되고 나가 있는 시간도 점점 길어졌죠.”
퇴근 시간이 되면 다른 팀은 가방을 들고 문을 나선다. 그러나 I가 속한 팀은 하릴없이 직장 상사를 기다린다. 급한 일이 있을 땐 부장이 있는 흡연실로 찾아가 머리를 숙이고 퇴근하지만 뒤끝이 좋지 않았다.
“퇴근한다고 하면 꼭 일 이야기를 꺼내요. 오늘 지시한 일은 어떻게 됐냐고요. 급한 일도 아니고 일정도 많이 남은 걸 알면서도요. 부하 직원이 먼저 가는 걸 아니꼽게 생각하는 거죠. 부장 눈치 때문에 퇴근길 내내 찝찝함이 가시질 않아요.”
결국 팀원들은 부장이 돌아오면 그제야 인사를 하고 회사 밖으로 나섰다. 여느 때처럼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겨 부장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퇴근할 생각에 기쁜 팀원들은 다 함께 인사를 하러 갔다. 부장은 외투를 챙겨 입고 가방을 들고 다가오는 팀원들을 몇 초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팀은 의욕이 없어. 상사가 일이 많아서 남아 있는데 팀원이란 것들은 집에 가기 바쁘네.”
부장의 표정과 말을 흉내 낸 I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부장은 말을 참 기분 나쁘게 해요. 그런 학원을 다니는 것 같아요. 안 그래도 힘든 하루인데 그 사람 말 한마디에 더 힘들어져요.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힘들까요?”
계속되는 상사 눈치에 I와 팀원들은 칼퇴를 포기했다. 다른 팀이 가는 것 만 멀뚱멀뚱 쳐다봤다. 자신들과 다른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았다. 그렇다면 부장은 무슨 일이 있길래 퇴근하지 않고 남아 있을까? I에게 6시 이후 부장의 일과를 물어봤다.
“부장이 왜 야근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저녁 먹으려고 남아 있는 것 같아요. 6시가 되면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나가서 30분 뒤에 들어와요. 그러곤 포털 뉴스를 조금 보다가 7시에 저녁을 주문해요. 밥이 오면 제일 먼저 달려가서 본인 꺼만 챙기죠. 환하게 웃으면서요. 그렇게 밝은 모습 처음 봤어요.”
부장의 모습이 이해 가지 않았다. 회사에서 저녁 식사를 하며 회의실 TV로 뉴스를 봤다. 배를 채운 부장은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갔다. 치우는 건 팀원들의 몫이었다. 또다시 흡연실에 다녀온 부장은 자리에 앉아 타 부서 사람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일하는 티를 냈다. 일이 많아 바쁘다고 했는데, 팀원들은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30분쯤 지났을까요? 부장이 일어났어요. 피곤해서 못하겠다고요. 다들 고생했다면서 퇴근하자고 말했어요. 그때 시간이 9시쯤이 었는데, 일 한 시간은 몇 분 안됐을 거예요. 왜 남아 있을까요? 저녁 한 끼 때우고 들어가려고 그런 건가? 우리 팀은 무슨 죄인가요.”
I의 답답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알 수 없는 회사 생활이었다. 바쁘다고 말한 상사는 퇴근하는 팀원에게 눈치를 줬다. 바쁜 일을 거들기 위해 남아있어도 할 일이 없다. 비효율적이고 상사의 눈치를 살피는 팀 분위기 때문에 모두들 지쳐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사 한 명으로 인해 팀 전체가 의욕을 잃어버렸다.
“퇴근할 시간에 퇴근하고, 퇴근할 사람은 퇴근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에요. 기본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사는 자신의 능력을 부끄럽게 생각해야죠. 야근한다고 일 열심히 하는 건가요? 요즘은 일 못하는 사람이나 남아서 야근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