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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소장 Mar 03. 2021

임금 피크제에 들어간 상사

“잘 못 보이거나 실수했다가 인사 불이익이 있을까 봐 다들 두려워했죠. 그런데 이제 달라졌어요. 인사권이 날아간 그에게 아침 인사, 퇴근 인사조차 하지 않아요.”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고 아무리 높은 권세를 가져도 오랜 세월 지속하지 못하고 언젠가는 무너지게 된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의 뜻이다. 회사에 적용해 생각해보자. 꼴 보기 싫은 상사도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희망적인 말이다. 증명이라도 하듯 N이 다니는 회사 실장의 권세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바로 임금피크제 3년 차에 돌입하면 서다.


 “절대권력이었죠. 취업 후기 사이트에 올라온 글이 있었어요. 대표가 있지만 실세는 실장이라고요. 수렴청정한다는 글과 상왕이란 표현이 적혀있었죠. 대표는 이걸 보고 게거품을 물었지만 직원들은 맞는 말이라 생각했답니다. 저도 그렇고요.”

 프로젝트를 준비할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실장의 입맛이다. 고객 프로모션을 기획하는데 회사의 고객보다는 실장이 좋아할 내용을 채워야 했다. 사무실 분위기도 실장 기분에 따라 좌우되었다. 기분이 좋은 날엔 사무실에 노래도 틀고 웃음소리도 들렸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모두 쥐 죽은 듯 다녔다. 그가 퇴근하기 전까지 팀장들은 퇴근할 수 없었고 말단 직원인 N은 퇴근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회사 인사권을 쥐고 있었죠. 팀장들 중에 실장에게 결재받으러 가면 긴장해서 말을 더듬는 사람도 봤어요. 잘 못 보이거나 실수했다가 인사 불이익이 있을까 봐 다들 두려워했죠. 그런데 이제 달라졌어요. 인사권이 날아간 그에게 아침 인사, 퇴근 인사조차 하지 않아요.”


 임금피크 3년 차에 돌입한 실장은 주요 직책에서 내려왔다. 업무도 후임 팀장에게 다 넘겼다. 법인 카드 한도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줄었다. 사내 규정상 실장에겐 차량이 제공되지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실장의 차라고 불려졌던 영업용 차도 더 이상 타지 못했다. 차 키를 반납한 실장은 대중교통을 탔다. N은 가끔 출퇴근 길에 실장과 마주쳤는데 일부러 못 본 척하며 눈을 돌렸다.

 “주요 직책에서 내려오면서 많은 걸 내려놨죠. 월급도 대폭 꺾이고요. 실장이 그간 많이 벌어놔서 걱정되진 않네요. 그 사람이 내 월급 걱정하지 않은 것처럼요. 저 또한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얼마 전 실장이 타 부서 팀장에게 점심 같이 먹자고 했거든요. 그런데 팀장이 선약이 있다고 거절했어요. '밥 먹자', '술 먹자'는 실장의 어명이었는데, 당당하게 안 된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주변 사람들도 놀랐어요. 실장에게 ‘안 된다’는 말을 하다니요. 직원에게 거절당하는 게 처음 아닐까요? 우린 실장에게 수없이 거절당했지만요.”


 모든 결재는 실장으로 통했다. 결재라인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막판 빌런이었다.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에겐 별것도 아닌 걸로 사사건건 태클을 시도했다. N도 그중 한 명이었다. 프로젝트 내용 중 ‘광고 집행’이란 단어를 실장이 걸고넘어졌다. 이유는 '집행'이란 단어가 너무 공격적이란 이유였다. 어이없는 트집에 N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상왕의 결재 반려에 눈물을 머금고 기안을 수정했다.


 “인사 발령 며칠 뒤 실장이 말을 걸었어요. 그간 저를 몰아붙이고 다그친 건 모두 저의 성장을 위해서였대요. 하루하루가 힘들고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순간이에요. 그런 말 한마디로 풀릴 일이 아니죠. 퇴직을 앞두고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봐요. 끝까지 졸렬한 모습이네요.”


 상왕 실장은 원래 '실장실'에서 생활했다. 임금피크제 차수가 높아 지며 방에서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보통 퇴사를 앞두면 다른 지사로 가는 게 전통이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는 본사 작은 부서에 자리 잡았다. 지사 직원들은 건물 리모델링과 수도 공사 이유로 실장을 모시지 않았다. 사실 핑계였다. 실장을 싫어한 사람들이 갖은 이유를 만들어 밀어냈고 결국 방어에 성공했다.

 “꼬장꼬장한 시어머니 모시기 싫어서 이리저리 피하는 며느리 모습 같았어요. 실장 성격이 보통이 아니거든요. 이젠 실장이 힘도 없으니 지사장과 팀장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거죠. 떠안으면 분명 온갖 잔소리를 해댈게 뻔하니까요.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은 다 실장에게 있다고 봐요. 뿌린 대로 거두는 거죠.”


 이빨 빠진 호랑이의 모습은 비참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말 한마디에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들고 직원들을 호령하던 ‘실장’의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곧 퇴직을 앞둔 늙은 남자의 뒷모습만 보였다. N은 그런 실장에게 연민을 느꼈다. 구부정한 자세로 뉴스를 보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아주 잠시였다. N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통쾌하기도 했어요. 죽을 만큼 미운 사람을 이젠 신경 쓰지 않아도 되거든요. 그 사람 때문에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N은 실장에게 고통받은 나날을 떠올리며 울분을 터트렸다.


 “이야기를 들으니까 실장이 불쌍하기도 하네요. 아버지 모습도 떠오르고요.”


 “회사 사람들도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런데요. 대입하기 싫어요. 실장이 우리 아버지라면 너무 싫을 것 같아요. 존경할 만한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니까요.”


 단호한 N의 태도에 머쓱했다. 화를 가라 앉힌 그는 덧붙이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이제 조금만 참으면 얼굴을 안 볼 수 있어요. 싫어하는 상사가 회사를 떠나는 순간을 드디어 맞이 하네요. 훗날 있을 송별회 자리도 가지 않을 거예요. 그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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