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주는 곳 없는 방과 후
바닥을 치며 구르는 너를 제압하는 선생님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겨우 진정시킨 뒤, 선생님이 다가와 말했다.
“이대로는 저희도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없어요.”
그 말과 함께, 너를 데려가라고 했다.
진정된 너를 차에 태우고 돌아오는 길, 가슴이 몇 번이고 울렁거렸다.
슬픔과 미안함,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무력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다음 날, 선생님이 제압하며 잡았던 네 손목과 발목에는 선명한 손자국 모양의 멍이 남아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너의 짜증과 멍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말을 하지 못하는 네가 할 수 있는 저항은,
그렇게 드러눕고, 가기 싫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뿐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곳은 ’ 장애인 방과 후 센터‘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경증 장애 아이들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선생님들은 대기 인원이 많다는 이유로
편한 아이들부터 우선적으로 받았고,
우리 아이처럼 인지가 낮고 손이 많이 가는 아이들은
결국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방과 후 센터는
어린이집처럼 인터넷으로 대기 순번을 확인할 수도 없고, 센터의 재량에 따라 선정이 이루어졌다.
우리가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건,
단지 그 센터가 처음 문을 연 초기였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 인지가 좋은 아이들이 점점 많아지자,
우리 아이는 더 이상 그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골칫덩어리가 되어버렸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더는 그곳을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방과 후 센터를 알아보는 것도 포기했다.
편한 아이들을 우선적으로 받는 듯했기에,
상담조차 해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센터를 그만둔다고 해서
아이가 금세 안정되지는 않았다.
그 근처만 가더라도 바닥에 드러눕거나 비명을 질렀고,
수업 중 힘든 일이 생기면 공격성을 띠려 했다.
학교에서도 짜증이 늘었다는 피드백이 돌아왔다.
그러나 두 달쯤 지나자, 아이의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이제는 스스로의 루틴 속에서
‘방과 후 센터를 가지 않는다 ‘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지자, 웃는 날도 많아지고 다시 애교도 늘어났다.
무발화 중증 자폐를 키운다는 것은,
이유를 모르는 아픔과 상처를 함께 견디는 일이다.
너의 몸에 남은 멍을 볼 때마다,
내 마음에도 같은 멍이 생긴다.
하지만 네가 말하지 못하는 한,
나는 그 상처의 이유를 알 수도 없고,
너뿐만 아니라,
나 역시 그 상처를 치료할 수 없다.
그저,
오늘도 잠든 너의 손에 약을 발라주며 속삭인다.
“사랑해. 알아주지 못해 미안해.”
그리고 조용히 눈물을 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