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종말' 서평
모든 질문의 해답,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팽창에 있었다. 팽창이 불러온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결국은 팽창이었다.
- '신화의 종말' 중에서
1.
필자는 카투사로 평택 미군 부대에서 군 복무를 했다. 토익 780점 이상을 받아야 카투사에 지원할 수 있는데, 기가 막히게 지원 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토익 시험에서 785점을 받아 지원했고, 기가 막히게 합격했다. 카투사 합격부터 부대 배치까지는 정말 우주의 기운이 내게 모이는 느낌이었다. 12명의 대학 동기 중 나 혼자 약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고, 가장 가고 싶던 평택 부대에, 그것도 가장 원하던 보직으로 배치되었다.
평택 부대에 가보니 또 우주의 기운이 내게 몰려왔다. 어느 군대 어느 부대마다 마찬가지겠지만 카투사도 다 같은 카투사가 아니다. 무늬만 카투사이지 한국군 사무실에서 한국군과 똑같은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고, 막사(미군부대에선 barrack이라고 부른다.)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곤 미군 하고만 일하면서 사실상 외국생활을 하며 영어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운 좋게도 필자의 경우 후자였다. 우주의 기운이 모인다고 할 만하지 않나.
2.
그런 이유로 미군들과 이야기할 시간이 많았다. 4명 정도가 상주하는 사무실에 한국인이라곤 나뿐이었다. 나머지는 미군 병사들이었는데, 미군은 한국군으로 치면 '병장' 이상의 계급이 아니면 그냥 다 친구다. 일, 이, 상병까지는 서로 지시를 내릴 수 없다. 그렇다 보니 출근해서는 해야 할 일 후딱 처리하고 나면 나머지 시간은 그냥 미군들과 노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같은 사무실에 일하던 여군에게 '어쩌다 한국에 오게 됐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독일 파병을 지원했는데 떨어져서 한국에 왔다.'라고 대답했다. 잠깐, 독일에도 미군이 있나? 찾아보니, 미국령을 제외하고도 '미군이 주둔하는 나라'는 20개가 넘는다. 그런데, 우리나라야 북한이 있으니 그렇다 치고, 이미 세계적인 선진국 반열에 오른 독일, 일본 등에도 주둔하다니. 미국은 왜 그렇게나 많은 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걸까?
3.
군 복무 시절 짧게 가졌던 의문에 대답을 제시하는 책이 바로 '신화의 종말'이다.
이 책은 미국의 역사를 관통하는 '변경(프런티어)'이라는 개념에 대한 책이다. 뭔가 들어본 것 같은데 무엇인지 설명하기는 어려웠던 '프런티어 사관'에 입각해 미국 역사를 설명하는 책이다. 변경(프런티어)이라는 말은 국경이라는 말과 비슷한 뜻으로 보이지만, '변경'은 단순히 지리적 경계선을 넘어, 문화적, 경제적 세력 범위를 포괄하는 단어이다. 저자인 그렉 그렌딘에 따르면, 미국은 끝없는 변경의 팽창을 통해 미국의 성장과정에서 겪는 성장통을 덮어왔다.
처음 영국인들이 북아메리카에 정착해 터전을 일군 동부 지방에는 날이 갈수록 인구가 늘어났다. 더 많은 영국인들이 종교 탄압을 피해 대서양을 건너왔고, 먼저 정착한 이들의 자녀들이 생겨나며 점점 인구가 늘어난 것이다. 노동력의 공급이 수요 이상으로 많아지면 임금이 떨어진다. 임금이 떨어지면 생활수준도 떨어지고 노동자들의 불만도 고조된다. 이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인구가 많아져 노동 여건이 열악해지면 서부로 이동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비어있는 땅을 차지하고 경작하면 되는데 굳이 사람들이 불합리한 환경 속에서 노동을 할 리가 없었다. 이 또한 비어있는 땅이 없다면 불가능한 해결책이지만, 그렇기엔 아메리카 대륙은 너무 넓었다. 그렇게 점점 미국인들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퍼져 나갔다.
4.
이렇듯 서쪽으로 퍼져 나가면서, 미국은 또 다른 문제들을 마주한다. 첫째는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에 대한 처우였다. 수많은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보듯 영국 출신 정착민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매우 잔혹하게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았다. 그렇지만 그들을 모두 죽인 것은 아니었다. 미국인 나름대로(?) 원주민과 평화롭게 지내기 위한 노력을 했다. 당장 그들에게 필요한 땅을 얻기 위해, 원주민들에게 '다른 땅'을 약속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점차 변경 밖으로 밀어냈다. 그렇게 원주민들은 더 서부로 이동했고, 몇 년, 몇십 년 후에는 또 다른 변경으로 그들을 밀어내며 점점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했다.
또 다른 문제는 흑인 노예 문제였다. 서부로, 서부로 진출하며 큰 규모의 농장을 경작할 일손들이 필요했고, 백인 노동자를 쓰기에는 임금이 너무 높았다. 농장주들이 찾은 해답은 흑인 노예를 부리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용주들이 값싼 흑인 노예를 쓰니 백인 노동자들의 일감이 줄었다. 노동 수요가 크지 않으니 임금이 상승하지도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난한 백인'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대한 분노를 고용주들이 아닌 시스템의 희생자인 흑인들에게 돌렸고, 그렇게 KKK와 같은 백인 우월주의 단체나, 흑인들에게 린치를 가하는 자경단이 생겨났다.
5.
이들이 국내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이 선택한 해결책은 이번에도 팽창이었다. 멕시코가 소유하고 있던 텍사스, 캘리포니아 지역의 영토를 침탈했다. 사람들의 관심을 국내 인종문제가 아닌 국경 문제로 돌린 것이다. 자연스레 KKK 단, 자경단들의 활동은 국경을 넘어오는 멕시코 이민자들을 추방하거나 사살하는데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제 문제가 생겼다. 더는 확장할 영토가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멈추지 않았다. 공산주의와 테러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한국, 이라크,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등에 진출했다. 군사 진출 외에도, 다국적 기업들을 통한 경제적 영역의 확장을 멈추지 않았다. '변경'이라는 개념은 이제 '국경'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확장할 변경이 있는 한 미국에 약속된 부는 무한했고, 그렇게 미국의 부는 커져만 갔다.
6.
카투사 이야기로 시작해 이야기가 길었다. 어쨌든 지금처럼 미국이 전 세계 수많은 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이유는, '팽창'이 곧 미국의 성공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노동력 문제를 팽창으로 덮었고, 인종의 문제를 팽창으로 덮었으며, 전쟁의 문제를 팽창으로 덮었고 또 경제의 문제를 팽창으로 덮어왔다. 이렇듯 전 세계로 팽창해가기 위해선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미국은 '세계의 경찰'을 자처한 것이다. 분명 '세계의 경찰'로부터 수혜를 받은 나라들도 많다. 그렇지만, 관점에 따라 미국은 그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제적 문어발을 뻗는 양아치일 뿐이다. 판단은 각자에게 달려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미국의 팽창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이다. 성공의 역사를 이어오던 미국은 베트남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비록 4년의 집권으로 끝났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하에서의 미국은 '세계의 경찰'과는 거리가 멀었다. 끝없는 팽창이 끝없는 부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을 잃은 모습이었고, 문을 닫고 한정된 부를 미국이 독식하려는 듯한 시도를 보였다. 그리고, 얼마 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며 변경을 좁혔다. 또한, 이전에는 경쟁자가 없었지만 현재 중국의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기도 하다.
미국 주도의 강력한 국제 질서 하에 평화를 유지하던 '팍스 아메리카나'가 끝날 것이라던가, 중국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예단을 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미국은 그동안 내세우던 '끝없는 팽창'의 한계를 경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한계를 넘어서고 새로운 변경을 개척해낼지, 이제는 제한된 변경 내에서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는 모르는 일이다.
책 '신화의 종말'은 이에 대한 답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다. 그저 '프런티어 사관'에 기초해 미국의 지난날을 담담히 풀어낼 뿐이다. 그럼에도 이를 통해 아직까지는 '슈퍼파워'인 미국이 지금껏 보인 행보를 이해할 수 있었고, 앞으로 미국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상상해볼 수 있었다. 과거를 통해 미래에 대한 통찰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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