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제주댁 이야기 | #비자림 #추억여행 #나홀로여행
스물다섯이 되던 해, 11월 11일. 첫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 집을 정리하는 날, 돌연 제주로 떠났다.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머물렀음에도 뚜벅이 여행이라 갈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중 한 곳이 2,800여 그루의 비자나무가 밀집해있는 제주 평대리 비자나무 숲(비자림)이었다. 화산 분화로 생긴 토양, 송이로 가득한 붉은 산책길의 양 옆으로 녹음이 짙고 울창한 비자나무들이 그늘을 만들고 커다란 숲을 이루어 사시사철 많은 여행객들이 이 길을 걷기 위해 찾아온다. 엄청난 비바람이 오락가락했던 때, 가을보다는 초겨울에 가까운 날씨에 가이드북, 셀카봉, 우비 등 갖가지 물건을 넣어 불룩해진 가방을 둘러메고 혼자서 터벅터벅 산책로를 걸었다.
곧고 우직하게 늘어서 있는 창창한 비자나무들과 색색의 단풍나무가 어우러져 넋을 놓게 만드는 풍경을 바라보고 앉아 한참을 사색에 빠져있었다.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잘했다, 잘하고 있다'라고 스스로를 토닥였다가 '할 수 있다'며 속으로 파이팅을 외쳐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어떻게든 불안함을 떨쳐내고 스스로를 믿어보려 애쓰던 내 모습이 이따금씩 생각나서일까. 나에게 비자림은 단순히 좋은 것을 넘어 애틋하기까지 하다.
한 달 동안 제주에 머물며 어디가 제일 가보고 싶냐는 그의 물음에 가장 처음으로 꼽은 장소 역시, 비자림이었다. 혼자 많은 시간을 보냈던 남다른 추억이 있는 곳이자, 지난 제주 여행에서 이니스프리 제주하우스에 이어 들어가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또 하나의 장소이기도 했다. (매표 마감시간을 제대로 알지 못한 우리의 잘못 때문이었다)
8년 만에 다시 찾은 비자림, 감회가 새로웠다. 흘러간 세월 속에 참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초겨울의 스산함은 온데간데없고 봄의 따스한 햇볕과 초록의 싱그러움만이 가득했다. 20대 사회초년생이었던 나는 어느새 30대를 훌쩍 넘겼고, 아무 말없이 팔짱을 끼고 걸었던 그 길 위를 이제는 내 손을 잡고 느린 내 발걸음에 맞춰 걸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건네주는 그와 함께 걷고 있다.
아무런 방해도 없는 그곳 벤치에 앉아 한참을 사색에 잠겼다. 늘 치열한 현실에 부딪혀 안정적인 미래를 걱정하기에 급급했던 나. 이렇게 온전히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때가 언제였던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언제든 이 순간의 마음을 떠올려 볼 수 있도록 떨어진 비자나무 잎 하나를 가져왔다. 이따금씩 힘이 들 때면, 수첩 속 말라있는 잎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때의 내가, 나에게 다독이던 위로의 말들도 전해져 온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_ 이나윤 여행 산문집, <오늘은,> 86-88p
변화된 많은 것들 가운데 정작 바뀌어야 할 20대 초반의 불안함과 막막함은 안타깝게도 사라지지 않은 채 남겨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비자림에 있는 그 순간만큼은 그런 마음조차 '그때도 그랬는데'하며 웃음 지을 수 있는 8년이라는 세월의 연결고리 정도로 느껴질 뿐이었다.
이 곳에서 만큼은, 이 순간만큼은
달라진 것들도, 사라지지 않은 것들도
어느 하나 미운 것이 없었다.
어느 하나 애틋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 비자나무는,
늘 푸른 바늘잎나무로써 제주도와 남부지방 일부에서만 자라는 귀한 나무다. 잎 뻗음이 非자를 닮았으므로 비자(榧子)란 이름이 생겼다. 비자열매는 속에 땅콩처럼 생긴 단단한 씨앗이 들어있다.
⊙ 비자나무에는,
테르펜(terpene)이라는 정유성분이 많이 들어있는데, 숲 속에서 천천히 걷는 사람의 자율신경을 자극하고 성격을 안정시키며 체내 분비를 촉진할 뿐만 아니라 정신집중 등의 뇌 건강에 좋은 작용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