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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림공작소 Mar 27. 2019

6년이 지나도 같은 일을 하는 직장 생활

'나는 이렇게 소모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잠식되어 갔다

이전 글에서 썼듯이 나의 회사 생활이 밑도 끝도 없이 비합리적이고 고생스럽기만 하지는 않았다. 가끔 인스타에서 ‘이게 실화야?’ 싶은 일화가 만화로 그려진 것을 보게 되는데, 다행히도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은 겪어보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초반에 회사 생활을 좋아했었다. 아무리 회사에 대한 불만이 생겨도 학교보다는 재미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나의 첫 직장은 종합쇼핑몰 L사였고, 포지션은 웹서비스 기획자였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홈페이지를 만들고 운영하는 일을 쭉 해왔고, 대학교 1학년 때는 1년 정도 쇼핑몰을 직접 만들어서 운영을 했었다. 기획과 개발, 디자인을 혼자 다 하던 시절에서 벗어나, 개발과 디자인을 전문가가 한다고 하니 나는 회사 생활에 대한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10년 전의 일인데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머리가 반 이상 벗겨진 이사님이 화이트보드에 무언가를 끄적이며 열변을 토하는 장면이다. 평소 나 혼자 고민하고 시도해보던 일을, 여기서는 수백 명이 트래픽을 늘리고 전환율을 높이려고 고민하는 모습에 적잖이 감동(?)을 했던 모양이다.


입사 초기에는 사이트 소소한 것까지 같이 고민하는 모습에 감동


그러나, 첫 번째 프로젝트에서 일이란 그렇게 감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TF팀을 구성해서 카테고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비하는 일을 진행하게 됐고, 그중 한 명으로 들어가게 됐다. 이 일을 지시한 대표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사원도 납득할만한 사용자 중심의 카테고리 구조를 만들라”라고 지시했으나, 카테고리만큼 회사의 사정이 반영된 것도 없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어느 쇼핑몰을 들어가도 다 비슷해 보이겠지만, 카테고리 하나하나가 담당 MD의 영역이라, 위치와 네이밍은 매출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다). 그래서 뭔가 매출이 떨어지면 기획팀에 화살이 꽂히는 일도 다반사인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끝도 없어서 이번 글에서는 패스 :)


어쨌든 5~6명이 배분해서 맡은 카테고리를 4단계까지 세세하게 분류를 해왔고, 그것에 대해 모여서 논의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어떤 카테고리를 맡았는지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유아동의류/용품' 카테고리를 맡았던 것은 기억이 난다. 온통 모르는 단어 투성이라 집에 일을 가져가서 부모님께 질문했던 적도 많았다.


현재 네이버의 출산/육아 카테고리. 27세 남자에겐 너무나 생소한 단어가 많았다


머리를 맞대고 카테고리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각 카테고리의 담당 MD가 누구인지까지 고려하면서 많은 말들이 오갔다. 당연히 한 명이 노트북을 잡고 말하는 것들을 바로바로 정리를 해야 했고, 당연하게도 신입사원인 나의 몫이었다. 종합쇼핑몰의 카테고리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분류하는 것과 다름없어서 수천 개의 줄을 바로바로 편집해야 했다. 군대에서 엑셀병(?)으로 지냈던 나는 자연스레 엑셀 잘하는 신입사원으로 이야기가 됐고, 덕분에 좋은 이미지도 생겼지만 안 좋은 일의 시작이기도 했다. 계속 같은 일을 하게 된다. 뭔가 정리하는 일이 생기면 나한테 일이 떨어졌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것들은 당연히 그랬고, 그 이후에도 업무 분장 시 ‘카테고리’라는 단어만 들어가면 그 일은 내 몫이 됐다. 


그로부터 6년 후, 두 번의 이직을 거쳐 세 번째 회사에서 마지막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다. 한참 전부터 퇴사 시기를 정해놨기 때문에 나한테는 이게 마지막 프로젝트였는데, 마지막 프로젝트에서도 카테고리를 정리했다. 첫 회사는 종합쇼핑몰이고, 마지막 회사는 오픈마켓 E사였다. 그래도 내 일은 계속 반복됐다. 물론 6년 동안 이 일만 한 것은 아니지만, 신입사원 때 했던 첫 번째 일을 나의 마지막 프로젝트에서도 또 하고 있으면 자괴감 비슷한 감정이 든다. ‘짜장라면’을 ‘라면’ 카테고리에 넣어야 하는지 ‘기타 면류’에 넣어야 하는지, 아니면 ‘라면’과 동급으로 ‘짜장/짬뽕’ 카테고리를 따로 뽑아서 이쪽으로 분류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은 한 번이면 족하지 않나 :) 일의 귀천을 따지는 게 아니라, 이게 과연 기획자의 일이 맞는지, 과장의 일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신기술이 쏟아져 나오는데, 6년이 지나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으면 소모되고 있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든다.


6년이 지나도 달라진 것은 커피 사이즈 뿐


물론, 퇴사 이후 창업을 하면 잡무가 더 많다. 포인트는 잡무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확장될 수 있느냐’에 있다. 위에서는 카테고리 업무를 예로 들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고 느낀 것은 비단 저 일 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1인 기업을 하게 된 지금은 일의 범위가 무한정으로 넓어지게 됐다.




다음 글에서는 이번 글과 마찬가지로 일의 범위에 대해, 직장인이 아닌 1인 기업가의 관점에서 써보려고 합니다.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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