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국립공원으로 최초로 지정된 공원은 어느 산에 있을까요?
네! 지리산 국립공원이 1호입니다.
이렇게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까지 흥미로운 이야기, 꼭 공유하고 싶은 스토리가 있어서 담아 둡니다. 지리산국립공원이 된 건 1967년도의 일이고, 그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 분위기는 자연보호라든가, 주말에 휴식을 지낸다거나 또 정부나 사회적 분위기가 성장과 개발에 주력하고 있을 때여서 국립공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던 때였다고 합니다. (출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역사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직접적이고 암울한 사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이후 무너진 도시를 다시 세우는 도시계획과 돈이 많은 재력가들은 자신들의 집을 근대적 양옥으로 짓고자 하는 요구가 많았는데, 건설 비용이 많이 드는 철근 보다 목재 수요가 증가하게 되어서 전국에서 목재상들이 '도벌'이라는 불법 산림벌채 행위가 기승을 부렸다고 해요. 또한 당시에는 아궁이에 나무를 때서 구들장을 데우던 시기였기 때문에 난방 연료로도 나무가 많이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산림이 우거진 지리산의 경우도 이 도벌꾼들이 많았고, 당시 구례에서만 하루에 트럭 250대 분량의 나무가 베어져 나갔다고 해요. 이 상황을 보아야만 했던 구례군 주민들은 직접 도벌꾼들을 막아서기도 했지만, 지리산 자체가 너무나 크고, 주인이 없는 곳도 많았고, 더구나 도시의 재력층들이 자신들의 집을 짓고자 하는 개인적 욕심도 있었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의 제재가 턱 없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구례주민들만 나날이 황폐해져 가는 지리산을 보면서 가슴을 태웠다고 해요.
당시 구례중학교에는 지리산으로 등산을 가는 교사들로 구성이 된 "연하반"이라는 산악회가 있었다고 해요. 한국전쟁으로 입산통제를 받고 있던 지리산이 1955년부터 처음 허가가 나기 시작해서 지리산을 오르기 시작했고, 등산로를 개척하고 있었다고 해요. 한국전쟁을 치르고, 경제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던 우리나라에서는 국립공원에 관련된 법률조차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 연하반에 있는 교사들은 해외 자료를 통해 국립공원의 개념을 정부보다 먼저 깨닫고 있었대요. 그래서 국립공원 지정 추진위원회를 꾸리고, 캠페인을 펼치면서, 이 운동을 추진할 자금을 십시일반으로 모았다고 해요. 구례 주민들이 얼마나 이 운동에 진심이었는지 전체 가구수가 당시 1만 2천 가구였는데, 이 중 극빈 가구층인 2천 가구를 제외하고 1만 가구가 이 운동에 함께 했다고 해요. 이 1만 가구가 10원씩 내어서 1963년는 10만 원을, 또 20원씩 내어서 1966년에는 20만 원의 기금을 조성했다고 해요. 당시 경제 상황으로는 10만 원이면 구례뿐 아니라 여수, 진주 등에서 집 한 채는 살 수 있을 정도의 거금이었다고 해요. 이 자금으로 추진위원회는 서울로 올라와서 국회에 건의서를 제출하며, 3년 동안 노력한 끝에 정부와 국회의 주목을 끌게 되었고, 1966년 3월에 국립공원법이 비로소 제정이 되었다고 해요. 그 후 여러 차례 조사단이 지리산으로 파견이 된 후인, 그다음 해 1967년 12월에 이르러서야 지리산이 1호 국립공원으로 지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구례주민들과 구례중학교 산악부인 연하반에서 기울였던 정성을 기억하며 지리산 봉우리들 중에서 이름이 없던 봉우리 하나에 "연하봉"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대요. 이 연하봉은 지리 10경 중 하나인 '연하선경'으로도 유명한 그 연하봉(1,721m)이라고 해요.
제1호 지리산 국립공원 이후에 국립공원은 계속 지정이 되어서 현재 23개가 있다고 합니다.
출처: 나무위키
* Top 사진: Unsplash의 Clark G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