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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는 내가 보고 애 엄마는 게임하는데요, 엄마

by 김콤마

오늘의 말씀

OO이요? 게임해요.

—나, 어머니와 통화 중에



묵상

아내가 아이를 보다 지쳐서 방에 들어갔습니다. 게임기를 들고서요. 최근에 자기 취향에 맞을 듯 말 듯 아직은 아리까리한 게임이 하나 나와서 틈틈이 취향에 맞는지 확인 중입니다.


제가 아이를 보고 있는데 어머니의 전화가 옵니다.


“예, 엄마. (…) 억돌이는 놀고 있어요. (…) 며칠 전부터 혼자 앉아 있을 수 있어요. (이후로 억돌이 얘기를 잠시 한 후) 집은 아직 모르겠어요. 매물이 다 들어갔나 부동산에서 연락이 없네. (이후로 집을 구하는 것에 대해 잠시 얘기한 후) OO이(아내)요? 애 보다가 들어가서 좀 쉬고 있어요. 게임해요. 스트레스 좀 풀어야죠. (…) 억돌이는 제가 보고 있죠.”


방에서 제 말을 듣고 있던 아내가 게임하는 걸 시어머니에게 고스란히 일러바치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방에서 나옵니다. 저희 어머니가 그런 것 갖고 뭐라 할 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어머니 귀에 그런 말이 들어가면 며느리로서 편할 리가 없죠.


아내가 조심스럽게 저를 살핍니다. 그런데 어라, 제 손에 폰이 없네요? 걱정스럽고 겸연쩍어 오므려져 있던 아내의 얼굴이 비로소 활짝 펴집니다.


아내: 뭐야, 진짜 말한 줄 알았잖아.

나: 개뻥이지! ㅋㅋㅋ

아내: 언제 끊은 거야? 어디까지 진짜야?

나: 끊긴 뭘 끊어. 첨부터 전화 안 왔는데! ㅋㅋㅋㅋㅋㅋㅋ


네, 전부 사기극이었습니다. 저 “게임해요”라는 회심의 한 방을 날리기 위해서 3분 정도 혼자서 어머니와 통화하는 척 연기한 거죠. 애를 보고 있다가 문득 아, 이거다, 이거면 또 아내를 놀려먹을 수 있겠다,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바로 실행에 옮겼어요. 이런 건 또 생각날 때 바로바로 해줘야 제 맛이거든요. 허탈해하는 아내의 표정을 보니까 얼마나 웃기던지요.


이렇게 아내를 놀려먹는 게 제 인생의 낙이에요. 연애 시절부터 온갖 속임수로 아내를 당황하게 만들고 약을 올렸습니다. 최소 일주일에 한 번씩은 이렇게 소소한 사기를 치는 것 같아요. 그럴 때 아내가 정색을 하며 냉랭하게 나오거나 아예 무반응을 보이면 진작에 그만뒀을 텐데 재미있다고 깔깔거리며 받아주니까 저도 신이 나서 매번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는 거죠. 오늘도 둘이서 한참 웃었어요.


오늘은 제가 생각해도 연기가 아주 훌륭했어요. 하긴, 연극 동호회 활동을 몇 년 했는데 그 정도 연기야 가뿐하죠.


그러고 보면 저는 연기를 잘해요. 무대 위에서 하는 연기가 아니라 일상에서 나를 감추는 연기요. 저는 자기검열광이에요. 마음속에서 어떤 생각이나 충동이 일어나면 그걸 입 밖에 내거나 실행으로 옮기지 않고 과연 그래도 될지, 남들이 어떻게 볼지 고민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타이밍을 놓치거나 자신이 없어서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행동을 못 할 때가 많죠.


그런데 아내와 있을 때는 그런 필터가 사라집니다. 아무 말이나 하고 아무 행동이나 해요. 아내를 만나기 전에는 저도 제가 이렇게 장난기가 심한 줄 몰랐어요. 연애 시절에 아내가 그랬어요. 얼굴에 초딩 같은 표정이 보일 때가 있다고. 생각해 보면 제가 아내와 있을 때는 정말 초딩처럼 장난치고 초딩처럼 충동적으로 행동하곤 해요. 그건 아내도 마찬가지여서 가끔 제가 “니 방금 그거 친구들 앞에서도 할 수 있나?”라고 물으면 “아이, 그걸 걔들 앞에서 어떻게 해!”라고 민망해하지요.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마음속에 있는 검열관을 무장해제시킵니다. 그래서 저는 아내와 있을 때 제일 나다워져요. 그래서 아내와 같이 있는 게 좋아요.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도 이렇게 편하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으면 세상 사는 게 더 재미있을 텐데 그건 영 안 되네요. 차차 나아지려나요.


여하튼 저는 그래서 아내와 함께 사는 게 행복합니다. 결혼하길 잘했어요.



기도

내일은 또 뭘로 골탕을 먹일지 좋은 아이디어 좀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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