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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Aug 12. 2019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메모하고 잊어버립니다

젊은 번역가의 공부 습관 (5)

<젊은 번역가의 공부 습관>이 새로운 제목으로 2020년 4월 11일 출간될 예정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해보고 싶습니다> 텀블벅 펀딩 바로 가기




“어느 때부터인지 나는 메모에 집착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와서는 잠시라도 이 메모를 버리고는 살 수 없는, 실로 한 메모광(狂)이 되고 말았다.”


저처럼 9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분들이라면 어렴풋이 기억나실 겁니다. 당시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이하윤의 <메모광>이라는 수필을 시작하는 문장입니다. 이희승의 <딸깍발이>, 윤오영의 <방망이 깎던 노인>과 함께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교과서 글 중 하나입니다.


그 시절에 읽었을 때는 어려서인지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았어요. 뭐 하러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메모하지, 참 피곤하게 사네, 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메모는커녕 수업 필기조차 잘 안하는 성격이었거든요.


그러던 제가 요즘은 메모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때는 몰라도 일할 때는 메모장을 요긴하게 이용합니다. 왜 메모를 하냐고요?


위의 수필에 나오는 구절로 대답하겠습니다. “생각났던 것을 생각하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내지 못할 때의 괴로움과 안타까움은 거의 나를 미치기 직전에까지 몰아가곤 한다.”


정말 그래요. 10년 전만 해도 뭐든 번뜩번뜩 기억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방금 생각했던 것도 돌아서면 잊어버린단 말이죠.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니면 스마트폰 믿고 아무것도 안 외워 버릇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기억력이 예전같지 않습니다. 분명히 조금 전에 ‘아, OOO해야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뭔지 기억이 안 나면 얼마나 답답한지 몰라요.


물론 생각날 때 바로 실행해버리면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되겠죠. 하지만 그게 항상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할 때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행동으로 옮기다 보면 일에 집중할 수가 없을 테니까요.


한창 번역 중인데 문득 ‘참, 우유 떨어졌지?’라는 생각이 든다고 해보죠. 바로 마트 앱을 켜서 장바구니에 넣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자면 번역의 흐름이 끊깁니다. 누차 말하지만 번역은 고도의 정신 작업인 만큼 집중력, 몰입이 매우 중요해요. 그런데 고작 2,000원짜리 우유 때문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몰입을 해치자니 아깝죠.


이럴 때 ‘이따 쉬는 시간에 우유 넣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때는 나중에 가서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지 않으려면 머릿속으로 계속 ‘우유, 우유, 우유, 잊지 마!’라고 되뇌야 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역시 집중력을 해치죠.


이 문제의 해법은 간단합니다. 바로 메모죠.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곧장 메모해두고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키보드 옆에 항상 메모장을 둡니다.




제가 메모하는 내용은 크게 6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1. 사야 할 것

2. 해야 할 일

3. 읽어야 할 책

4. 글감

5. 번역 수정 사항

6. 번역 중 막히는 문장


1~4번은 메모장에 기록합니다. 저는 리갈패드를 써요. 노란 종이에 줄이 쳐진 메모장인데요, 가격이 저렴하고 다 쓴 메모지를 깔끔하게 뜯어버릴 수 있다는 게 장점입니다.


(리갈패드 메모의 예)


이 중에서 2번 ‘해야 할 일’은 왼쪽에 예상되는 소요 시간을 적습니다. 그래서 5분 안에 해결 될 일은 25분 일하고 5분 쉬는 시간에(<습관 4.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25분 단위로 일합니다>) 처리해요. 시간이 더 걸리는 일은 나중에 길게 쉴 때나 업무가 끝난 후에 처리하고요. 귀찮아서 내일로 미루고 또 미루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만.


3번 ‘읽어야 할 책’은 번역에 필요한 책을 말합니다. 번역하다 보면 원문에서 언급되는 책이 많아요. 그중에는 꼭 읽어야 하는 책이나 읽으면 번역에 도움이 되겠다 싶은 책들이 있기 마련이죠. 그런 책은 모두 기록해뒀다가 몰아서 주문하거나 도서관에서 빌려옵니다.


4번 ‘글감’은요, 제가 나중에 <습관 17. 나를 알리기 위해 브런치를 운영합니다>에서 얘기할 내용과 관련이 있어요. 저는 번역가로만 남지 않고 작가가 되기 위해 꾸준히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글감이 샘솟진 않잖아요? 큰맘 먹고 글을 쓰려고 하는데 뭘 써야 할지 막막한 순간이 생겨요. 이럴 때 미리 기록해놓은 글감이 있으면 쓸 게 없다는 핑계로 글쓰기를 나중으로 미루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메모장에 기록한 내용 중에서 장기적으로 보관해야 할 것은 일과를 마친 후 따로 메모 앱에 저장합니다. 저는 다 쓴 메모지를 보관하는 성격은 아니어서요. 그때그때 세단기에 갈아버려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5번 ‘번역 수정 사항’은 번역 원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항목입니다. 앞서 번역한 내용 중에서 수정해야 할 부분을 말합니다. 가령 5장까지 ‘meeting’을 ‘회의’라고 번역했는데 6장을 번역하다 보니까 ‘미팅’이나 ‘면담’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일단 메모 앱에 저장해둡니다.


이렇게 메모해 놓은 수정 사항은 바로 처리하지 않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과연 그 표현으로 바꾸는 게 맞는지요. 처음에 생각했던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렇게 여유 있게 생각한 후에도 바꿔야겠다는 판단이 서면 그때 가서 수정합니다.


6번 ‘번역 중 막히는 문장’도 번역 원고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부분입니다. 번역을 하다 보면 이 문장이 정확히 어떤 뜻인지 확실히 이해가 안 갈 때가 있어요. 이때 대응법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제가 모르는 내용이 나와서 이해가 안 되는 경우에는 조사를 해봅니다. 가령 미국의 선거제와 관련해 ‘프라이머리’와 ‘코커스’라는 예비선거 방식을 운운하는 문장이다 하면 그게 구체적으로 뭔지 찾아보는 거죠.


둘째, 분명히 다 아는 단어들로 구성된 문장인데 저자가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분간이 안 될 때가 있어요. 이때는 일단 원문을 번역 원고에 그대로 써 놓고 넘어갑니다.


왜, 학창 시절에 선생님들이 그러잖아요? 시험 칠 때 헷갈리는 문제가 있으면 그것만 붙잡고 있지 말고 일단 다른 문제를 풀라고요. 어차피 지금 고민한다고 풀리지도 않을 문제 때문에 귀한 시간 낭비하지 말라는 뜻이죠. 그런 문제는 다른 문제를 풀고 다시 보면 또 해법이 보이는 경우가 있어요.


번역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막히는 문장은 뒤의 문장들을 번역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될 때가 있어요. 내가 모르는 정보가 있어서 이해가 안 되는 게 아니라면 십중팔구는 문맥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아서 의미가 정확히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계속 그 문장만 붙들고 고민하는 것보다는 뒷부분을 번역하면서 전체적인 맥락을 짚고 나면 비로소 문제가 풀리곤 하죠.


셋째, 자료를 조사하거나 문맥을 파악하는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문장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럴 때는 별수 없어요. 저자에게 문의해야죠. 이런 경우에도 번역 원고에 원문을 그대로 기록해 놓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저자에게 문의할 때 어디에 나오는 문장인지 정확히 알려줄 수 있도록 쪽수도 함께 기록하고 검색으로 이런 문장들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끝에 ‘##’라고 써둡니다.


왜 바로 저자에게 문의하지 않냐고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문단 단위, 챕터 단위로 볼 때는 이해가 되지 않던 문장이 나중에 최종 검토 과정에서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어 내려가다 보면 문득 이해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저자도 바쁜 사람인데 수시로 물어보는 것보다는 번역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몰아서 물어보는 게 저자의 시간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10년 넘게 번역을 했지만 당장 저자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번역 작업 전체에 차질이 빚어지는 문장은 만난 적이 없어요. 모두 막판까지 기다렸다 물어봐도 됐다는 말이죠.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제가 <습관 2. 글쓰기 레벨4가 되기 위해 미친 듯이 썼습니다>에서 소개한 마인드맵도 일종의 메모입니다. 글을 쓰기 전에 머릿속에 있는 상념을 모두 끄집어내 기록해 놓는 거죠. 막연히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눈에 보이는 형태로 저장을 해놔야 글을 쓸 때 참고할 수 있고 다 쓰고 나서도 혹시 쓸 만한 내용이 있는데 빠뜨리진 않았는지 확인할 수 있거든요.




오늘 습관도 정리하자면 간단합니다.


1. 번역 중에 떠오르는 생각은 메모하고 잊어버린다.

2. 번역 중에 막히는 문장은 일단 원고에 적어 놓고 넘어간다.

3. 쉬는 시간이나 일과 후에 메모를 확인해 처리 가능한 일은 처리한다.

4. 저자에게 물어봐야 할 것은 한 번에 몰아서 물어본다.


이렇게 메모를 생활화했을 때의 장점은 말씀드렸다시피 집중력 향상입니다. 번역은 집중력이 생명이에요. 집중력을 극대화하는 게 원고의 품질을 향상하고 같은 시간에 더 많은 문장을 번역하는 비결이죠. 저는 메모를 비롯해 집중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습관(습관 4~6번)의 힘으로 10년이라는 고비를 넘기고 아직도 번역가로 살고 있습니다.


<에버노트><노션(Notion)> 같은 메모 앱을 이용하면 메모 효율이 높아집니다. 컴퓨터, 폰, 태블릿의 메모가 자동으로 동기화되기 때문에 언제 어떤 기기로든 메모를 기록하고 열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카테고리, 태그, 검색 기능을 이용해 원하는 메모를 쉽게 찾을 수 있어요. 텍스트만 아니라 이미지, 파일도 함께 저장할 수 있고요. 저처럼 필체가 형편없는 사람은 나중에 메모 내용을 못 알아봐서 난감해지는 상황도 막을 수 있습니다.

저는 <노션>에 위에서 말한 1~5번 항목은 물론이고 번역료 지급 현황, 번역 참고 자료, 번역 일정, 영어와 한국어 단어장, 각종 서류 등 많은 것을 보관합니다. 개인 데이터베이스로 이용하는 거죠.

시중에 다양한 앱이 나와 있으니 실물 메모장을 휴대하고 보관하는 것이 불편한 분은 한번 이용해보시길 권합니다.


*이 글은 좋은 습관 연구소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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