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막썰어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하이라이트 Dec 23. 2019

죽으면 잊혀지나요

잠들기 전 아내가 품에 안겨 와락 눈물을 쏟았다.


“아빠……”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지 딱 한 달째다. 그 무렵이면 불현듯 슬픔이 사무친다. 내가 겪어봐서 안다.


열여덟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사람이 죽으면 처음에는 얼떨떨하다. 그 사람이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게 실감 나지 않는다. 그냥 어디 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올 것만 같다. 혹은 그 사람이 없는 건 알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런 비현실감의 유효 기간은 한 달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 달이 됐을 때 이모부가 우리 가족을 영일대로 데리고 갔다. 영일대는 포스코 직원 단지에 있던 제법 분위기가 좋은 레스토랑이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우리 가족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그곳에서 외식을 했다.


밥을 먹고 식당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나는 멀쩡했다. 그런데 이모부의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아버지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원래 저 운전석에는 아빠가 타고 있어야 하는데…….


나, 엄마, 할머니, 동생은 그대로인데 아빠만 없었다. 그 자리는 영영 채워질 수 없는 자리로 남았다. 내 삶은 변함이 없는데도 다시는 되돌릴 수 없게 변해 있었다.


그렇게 사별은 한 달 후 비로소 현실로 다가온다. 슬픔의 파도가 몰아친다.


그리고 그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는 그리움이 남는다. 슬픔은 서서히 그리움에 자리를 내준다.


이제 아버지를 보낸 지도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버지를 생각해도 슬프지 않다. 다만 아버지가 보고 싶을 뿐이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할 수 있었을 일을 생각하고,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며느리와 손주를 얼마나 예뻐하셨을지 생각한다. 그 그리움은 내가 다시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하다.


그리움은 망각의 반대말이다. 죽은 사람은 잊히지 않는다. 사람의 인연이란 그렇게 쉽게 끊기지 않는다. 죽었다고 잊힐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그 죽음이 슬프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인연은 손으로 잡아당겨도 툭 끊어질 실오라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가족, 연인, 친구의 인연은 잡아당기면 손이 끊어질지도 모른다.


그리움의 곁다리로 원망이 끼어들 수도 있다. 나는 한동안 아버지를 원망했다. 생전에 아버지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장남인 내게 다 떠안겼다고 생각했다.


나는 죽은 아버지에게 종종 그런 원망을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어디선가 들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들을 수 있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나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응답은 없었다.


남들에게 가족사를 잘 얘기하지 않는 내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사람들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연극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가족이란 주제로 극을 만들 때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내 마음의 응어리가 나왔다.


그러고서 다음날이었던가, 그다음 날이었던가, 고모에게 전화를 걸 일이 생겼다. 생전 고모에게 전화 안 하던 내가 전화를 걸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고모는 안 그래도 그동안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기회가 없었다며 전화를 잘했다고 하셨다. 그리고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편지를 받았다고, 아버지의 편지를.


그 편지의 내용과 아버지의 기구하다면 기구했던 인생을 고모는 담담히 풀었다. 편지에 대한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고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자세하게 듣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고모와 통화한 후 나는 아버지에게 연민이 생겼다.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과 조금 다른, 생전의 아버지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내 안의 원망은 물에 탄 설탕처럼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후로 내 그리움은 쓴맛보다 단맛이 난다.


그게 순전히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아버지가 내게 해주고 싶던 말을 고모를 통해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차피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계기로 원망 대신 연민이 남았고 그 언저리에 아버지에 대한 사랑 같은 것도 어렴풋이 달라붙었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잠자던 아이가 울어 달래고서 그 옆에 누웠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나 이 정도면 잘 살고 있지? 문득 할머니가 생각났다. 아들 먼저 보내고 십수 년을 그리워하다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와 할머니가 하늘에서든 어디에서든 서로 만나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이 그려졌다.


아버지도, 할머니도 내 삶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사람은 죽어도 잊히지 않는다. 다만 그리워질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장례식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