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막썰어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하이라이트 Dec 28. 2019

육아인에게 영화관 행차는 사치지

아이 돌사진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돌 지난 지가 한 달인데 이제야 스튜디오 촬영이 끝났다. 돌잔치를 집에서 가족끼리 조촐하게 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좀 느린 아이의 성장 속도에 맞춰 여유 있게 찍었다. 그것도 앞의 2번은 아이가 잘 웃지 않아 아내 마음에 드는 사진이 안 나왔기 때문에 3차 촬영 만에 성공했다.


돌아오는 길에 라디오를 틀었다.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다. 라디오 소리가 애 우는 소리를 중화한다.


<박선영의 씨네타운>에서 ‘엔젤스 셰어’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엔젤스 셰어란 위스키를 숙성할 때 증발로 인해 사라지는 2~3퍼센트의 술을 천사가 먹은 걸로 치자는 뜻으로 생긴 명칭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어서 무슨 곡이 나올지 감이 왔다.


켄 로치 감독의 2012년작 <엔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에 삽입된 더 프로클레이머즈(The Proclaimers)의 <암 고나 비(I’m Gonna Be)>.


음악을 듣기도 전에 마음이 한 뼘쯤 떴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던 때의 기분이 그랬다. 그냥 별 이유 없이 설레는 기분. 왠지 오늘 기분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 아니, 그런 일쯤 없어도 오늘은 행복하다는 기분.


국내에서 2013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관객수 1.8만을 기록했다. 어지간한 영화도 최소 수십만을 모으는 시대에 고작 1.8만이라니 어지간히 영화 좋아하는 인간들만 봤다는 소리고, 내가 그 인간들 중 하나였다.


켄 로치 감독의 팬이어서 굳이 극장까지 가서 그 영화를 본 건 아니다. 팬은커녕 켄 로치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지금도 켄 로치라고 하면, 당사자에게는 대단히 미안하지만, 바퀴벌레 퇴치제가 연상된다. 바퀴벌레는 영어로 로치(roach). 켄 로치는 r 대신 l을 쓰지만.


이 영화는 순전히 볼 영화가 없어서 상영 목록 보다가 적당히 고른 영화였다. 그렇다고 내가 블록버스터는 거부하고 남들 안 보는 영화만 찾아다니는 마이너한 취향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역시 블록버스터지, 주의자다.


왜 볼 게 없었느냐 하면 이미 그 주의 화제작은 다 봐버렸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랬다. 기본적으로 일주일에 최소 한 편은 보고, 삘 받으면, 혹은 딱히 할 일이 없으면 또 딴 영화를 보러 갔다. 주말에 조조로 땡기고 평일에 일 빨리 끝내고 땡기고 또 땡기고. 기억하기로 그 해에는 CGV도 롯데시네마도 VIP였다.


누구랑 그렇게 영화를 보러 다녔냐고? 영화는 혼자 봐야 제 맛이지. 내 취향에 맞는 영화 내가 편한 시간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화 전후로 카페나 식당에서 돈을 쓸 필요가 없어서 용돈도 절약된다.


그렇게 영화를 봐대니까 볼 게 없어서 마니아들이 보는 영화에도 손을 대는 지경이 됐다. 아니, 그쯤 되면 나도 영화 마니아였다.


그해에 극장에서 봤던 영화 중에 또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잉투기>인데 거기 나온 배우들이 나중에 메이저 드라마와 영화에 비중 있는 역할로 나왔을 때 얼마나 반가웠던지 모른다. 그래서 이 영화는 관객수가 어디 보자… 응? 또 1.8만이야? 2013년에는 나 같은 인간들이 딱 1.8만 명 있었구만.


그때는 그랬다. 극장에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극장이 좋은 건 그 90분, 120분 동안 다른 건 다 잊고 영화에만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캄캄한 극장 안에 있으면 다른 건 생각나지 않고 오로지 영화만이 나의 현실이다. 간혹 휴대폰 켜는 새끼들 대가리 리퍼시키고 싶긴 하지만.


방금 롯데시네마 앱을 켜보니 올해 누적 구매액이 달랑 3만 원이다. 총 4편 봤단다. 그럼 CGV는 어디 보자… 진주에는 현재 CGV가 없다. 메가박스도 없다. 그러니까 2019년 한 해 동안 극장에 간 게 딱 4번이다.


어쩌다 이리 됐냐고? 애 키우면서 극장 다니는 건 사치다. 애 낳기 직전에 아내가 친구한테 들었다며 꼭 영화를 보러 가야 한다고 했을 때만 해도 애 낳고도 보면 되지 웬 호들갑이야 했지만 막상 닥치니 그렇게 안 된다.


왜? 일단 평일에는 곤란하다. 애 재우고 나면 일러야 8시 반이다. 부랴부랴 극장 가서 9시 영화를 본다 해도 집에 오면 11시가 훌쩍 넘는다. 애는 아빠가 늦게 잤다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주지 않으니까 다음날 애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 일어나면 피로가 고스란히 남아서 일에 지장을 준다.


그러면 주말이라고 다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주말에는 본격적으로 애를 봐야 한다. 아내도 주말에는 좀 쉬어야 한다. 내가 종일 혼자서 애를 보진 않지만 육아에 지친 아내가 쉴 틈을 마련해줘야 한다. 적어도 같이 애를 봐야 한다. 아내를 위해서가 아니라 평일에 잔소리 안 듣고 바가지 안 긁히려면 그게 사는 길이다.


따라서 주말 낮에도 영화관에 가는 건 눈 딱 감고 저질러야 하는 일이다. 아내가 갔다 오란다고 냉큼 가면 안 된다. 그건 말하자면 공명의 함정이다. 덥석 물면 퇴로가 막힌다.


당장은 영화 보고 오라는 말이 진심일지 몰라도 나중에 싸움이 났을 때 불리해진다. 주말에 나는 애 보고 니는 영화 보러 다니더라, 라고 나오면 할 말이 없어진다. 꼼짝없이 독박 육아를 시키는 남편이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애초에 그런 여지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안 싸우면 되는 거 아니냐고? 내가 애 키워보니까 애한테 뺨 맞고 남편이나 아내에게 화풀이하는 일이 잘 생긴다. 우리 부부는 애 없을 때보다 딱 2배 정도 많이 싸운다.


주말 낮은 그렇고 주말 밤은? 금, 토요일 밤은 여유가 좀 있다. 내일 쉰다고 좀 늦게 잘 수 있으니까. 하지만 주말 밤에 하고 싶은 게 어디 영화관 가는 것뿐일까. 텔레비전도 보고 싶고 책도 읽고 싶고 게임도 하고 싶다. 그 경합 속에서 꼭 영화관이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다.


더구나 밖에 나가서 영화 보고 오려면 이동하느라 낭비되는 시간이 존재한다. 내 경우에는 가까운 영화관이 걸어서 20분 거리인데 그러면 오가는 시간만 쳐도 40분이 낭비된다. 금쪽같은 40분이.


고작 40분이라고 하면 안 된다. 애 키울 때는 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8시 반에 육퇴하고 12시에 잔다고 해봤자 내게 주어지는 시간은 4시간이 채 안 된다. 그런데 그 시간을 온전히 노는 데만 쓸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샤워도 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마트 주문도 해야 하고, 여하튼 좋아서 하는 건 아니지만 해야 하는 일들에 시간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내가 온전히 나만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아무리 후하게 잡아도 3시간 정도다. 그중에서 40분을 길바닥에서 버린다고 생각하면 쉽게 영화관을 선택할 수 없다.


그래서 이제는 애 낳기 전에 영화관에 갔다 오라던 아내 친구의 말이 피부에 와 닿는다. 애 낳고 나서 조그만 휴대폰으로 영화 보는 게 낙이라고 했던 동생의 말도 비로소 이해가 된다.


언제쯤이면 편하게 영화관 다닐 수 있을까? 글쎄. 앞이 캄캄하다. 몇 년 후에나 간다고 해봤자 애 데리고 <겨울왕국> 같은 거나 보러 다니겠지.


에라, 아이패드로 넷플릭스나 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가 안 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