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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Jan 01. 2020

새끼야, 새끼야, 내 새끼야

OO월 OO일 11시 <OO정보통> 촬영합니다. 원하시는 분은 모자이크 가능합니다.


엘리베이터 옆에 붙어 있던 하얀 A4 안내문. 아이 낳기 전에 종종 가던 인도 음식점이다. 1만 원이면 커리 2종류, 밥, 난, 샐러드, 라씨가 나오고 커리, 밥, 난은 무한리필인 세트가 인기인 집.


한동안 아이가 카페든 식당이든 가면 소리를 꽥꽥 질러대서 외식을 자제했는데 돌 지나면서 몸을 제법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니까 소파에 앉혀 놓으면 혼자 기어 다니고 일어나고 하면서 짧게나마 사람답게 밥 먹을 시간을 줘서 용기를 내어 다시 외식을 재개했다.


안내문을 보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저날 와서 밥을 먹어 말어? 와서 먹으면 방송 출연 100퍼센트다. 평일 오전에 돌아이, 아니, 우리 애가 좀 유별난 구석은 있지만 그 정도는 아니고, 돌 아이 데리고 커리 먹으러 오는 부부는 잘 없을 테니까. 더욱이 우리 애가 얼마나 예쁜데 방송에 안 내보내고 배기겠어.


아이를 낳기 전에는 SNS 프로필로 아이 사진을 걸어두는 인간들 이해가 안 됐다. 여러분, 얘 좀 보세요, 너무 이쁘지 않아요, 라고 묻는 것 같은데 내 대답은 니 눈에나 이쁘지, 였다.


나는 남의 애는 도통 예쁜 줄 몰랐다. 정말 쟤는 연예인 해도 되겠다, 급이 아니면 아무 감흥이 없었다. 아내가 육아 예능을 보면서 이쁘다, 이쁘다 감탄할 때도 옆에서 남의 아가 뭐 이쁘노, 라고 궁시렁댔다.


그래서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내 아가 태어났을 때도 안 이뻐 보이면 어쩌지.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 이제 막 분만실에서 나온 내 아이를 처음으로 대면했을 때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것은 내게 자식이 생겼다는, 난생처음 하는 경험 앞에서 느끼는 얼떨떨함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니, 왜 이렇게 생겼지, 하는 실망감이었다. 허연 피부에 쪼글쪼글 주름이 진 아이는, 나중에 아내가 쓴 표현을 빌리자면 아기 공룡 둘리에 나오는 꼴뚜기 왕자를 쏙 빼닮았다.


분만을 기다리면서 다른 아빠들이 신생아를 맞는 모습을 볼 때는 괜히 가슴이 뭉클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근데 막상 내 애가 태어났을 때는 감격보다 당혹감이 큰 게 또 당혹스러웠다.


우리가 묵던 산후조리원은 매일 저녁 아이를 방으로 데리고 와서 1시간 정도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줬다. 아이가 태어난 다음날, 고 팔뚝보다도 작은 것을 혹시라도 떨어뜨릴까 무서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팔뚝에 안았을 때 비로소 가슴에 찌르르 전기가 통했다.


아이는 날로 살이 오르면서 사람다운 형색을 갖춰갔음에도 여전히 꼴뚜기 꼴을 면치 못했다. 그런데도 그 꼴뚜기가 암만 봐도 예뻤다. 간신히 뜬 눈이 내 눈과 마주칠 때면, 아이가 아무것도 못 보고 의지로 시선을 조절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영국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그랬다지. 아름다운 걸 보면 눈물이 난다고. 내 품에는 딱 그렇게 나를 눈물 나게 하는 아름다운 꼴뚜기가 안겨 있었다.


이제 아이는 어느덧 태어난 지도 1년이 훌쩍 넘어 어엿한 인간이 됐다. 지도 컸다고 짜증 나면 소리를 하도 질러대서 저 새끼, 주둥이를 확, 하고 승질이 뻗게 만들지만, 보고 있으면 또 너무 예뻐서 주둥이를 확 깨물어버리고 싶다.


물론 내 카톡 프로필은 아이 사진이다. 여러분, 얘 좀 보세요, 너무 이쁘지 않아요?


그래서 식당 촬영한다는 안내문을 보고 갈까 말까 진심으로 고민했다. 이 예쁜 아이를 전 국민에게 보여주고 싶잖아. 나만 보긴 아깝잖아. (SNS에 아이 사진을 올리는 건 나도 모르게 어딘가 저장될지도 몰라서 싫지만 짧게 방송 타는 건 괜찮을 것 같았다.)


아무리 봐도 우리 아이 외모는 상위 10퍼센트권이다. 주변에서 얘보다 예쁜 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인다.


이게 내가 부모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객관적으로도 그런지 늘 궁금했다. 근데 이걸 또 어디다 물어봐. 질문을 받는 사람도 답하기 곤란하지 않겠어? 니 눈에만 이쁘다고 말했다가 눈깔 잘 씻고 다니라고 욕먹으면 어쩌려고.


얼마 전에 처제가 아내에게 지나가는 말로 답을 줬다. 이쁘게 생긴 건 아닌데 이쁘다고.


…… 그랬구나, 그냥 내 새끼라서 이쁜 거였구나.


괜찮다. 내 눈에 예뻐 보이면 그만이지. 진심이다.


내가 예쁘고 멋있다고 생각하며 키우면 분명히 아이는 그만큼 매력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외모를 밝히는 내면의 강렬한 빛이 생길 것이다. 그것으로 꼴뚜기에서 오징어로 변신할, 에이씨, 꼴뚜기나 오징어나, 왜 계속 내 새끼한테 그런 걸 갖다 붙여. 여하튼 분명히 남들이 봐도 감탄할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면 된 거다. 나는 왠지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다.


방송 촬영 날은 안 갔다. 어휴, 내 새끼가 이쁘긴 진짜 이쁜데 차만 타면 저 새끼 또 시작이다, 싶을 만큼 울어대는 새끼라 간 데 또 데리고 갈 생각 하니까 귀찮아서 관뒀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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