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제 책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해보고 싶습니다>의 독자에게 문의 메일을 받고 보낸 답장의 일부분입니다. 다른 번역가 지망생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아 당사자의 허락을 받아 공개합니다.
질문에 답부터 드릴게요. 지금 상황에서 대학원에 진학하는 건 권하지 않습니다. 딱 잘라 말하자면 아직 실력이 안 돼서요. 물론 어디까지나 OO 님이 쓰신 글로 미루어 판단했을 때 그렇다는 말이에요.
번역대학원에서는 학생들의 영어 실력이 상위권이라 가정하고 수업을 진행해요. 매주 영어로 된 논문을 읽고 토론하고, 다양한 텍스트를 한국어와 영어로 번역하죠. 그러니까 내가 영어 원서를 무리 없이 읽고 영작도 어느 정도 가능한 수준이 돼야만 수업을 따라갈 수 있어요.
그런데 OO 님은 번역 아카데미 입문반을 들었을 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힘들었다고 하셨죠. 그러면 대학원은 합격한다고 해도 기초가 약하기 때문에 좌절할 확률이 높아요.
혹시 아카데미 수업을 언제 들으셨나요? 어쩌면 지금은 그때보다 실력이 많이 향상됐을 수도 있겠네요.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가 영어 원서를, 논문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인가? 여기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대학원에 들어가기 위한 기준은 충족한다고 보셔도 돼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는 대학원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학문에 뜻이 있는 게 아니라면요. 대학원을 나온다고 번역가가 된다는 보장이 없거든요. 제 경험으로 보자면 학교에서 학생들을 업계와 연결해주지 않아요. 교수님이 개인적인 연줄로 실력 있는 학생에게 일을 알선해줄 수는 있겠죠. 하지만 출판계에서 그 정도로 끗발이 있는 교수님은, 글쎄요,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대학원을 나와도 번역계에 진입하는 건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합니다. 학기당 등록금을 500만 원이라 잡고 4학기를 다닌다고 치면 총 2,000만 원을 쓰고도 말이죠. 그 돈을 내고 번역가가 될 확률이 얼마나 늘어날까요? 제가 볼 때는 10퍼센트도 안 돼요. 출판사에서 번역대학원 나왔다고 모셔가기는커녕 조금도 특별한 대우를 안 해주거든요.
저는 번역가로 일을 시작하고 나서 대학원에 갔어요. 공부해서 교수가 되려고요. 한 학기 만에 학문은 제 길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 계획은 접었지만요. 대학원 다닐 때 저한테 번역가가 되는 방법을 물어본 대학원 동기와 선후배가 꽤 많아요. 학교만 다녀서는 답이 안 나오니까요.
그중에서 현재 출판번역가로 활동하는 분은 제가 알기로 세 명인데요, 한 분은 바른번역 글밥 아카데미를 나왔고 두 분은 크레센도 번역캠프 출신이에요. 대학원을 나왔지만 실제로 번역가가 된 건 아카데미를 통해서였죠.
제가 대학원 다닐 때 카페에 번역가가 되려면 대학원만 다녀서는 안 되고 아카데미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글을 올렸다가 욕도 먹었는데요, 결과적으로 보면 그때 저와 같이 대학원을 다녔던 분 중에 아카데미를 안 나오고 번역가로 자리잡은 분은 제가 알기로 없습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제 경험을 기준으로 한 거예요. 그때가 10년 전이었으니까 지금은 달라졌을 수도 있겠고 또 제가 나온 학교 말고 다른 학교는 사정이 다를 수도 있겠죠. 거기까지는 제가 몰라서 어떻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없겠네요.
그런데 설령 대학원을 통해 번역가가 되는 길이 열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아카데미를 권합니다. 대학원과 달리 아카데미는 출판계에 속해 있거든요. 번역 에이전시에서 직접 운영하거나 현업 번역가가 강사로 나서니까 실력 있는 수강생에게 직접 일감을 주거나 출판사를 연결해줄 수 있어요. 가격은 제가 나온 글밥 아카데미의 경우 현재 단계별로 12주에 65-85만 원으로 3단계를 모두 들으면 225만 원이예요. 대학원과 비교했을 때 비용은 10퍼센트 수준인데 번역가가 될 확률은, 제가 볼 때 적어도 2배는 넘을 겁니다.
물론 아카데미를 나온다고 다 번역가가 되진 않아요. 이제는 아카데미 수료생이 워낙 많아서 그 안에서 경쟁이 치열하니까 그중에서 실제로 번역가가 되는 사람은 글쎄요, 어디까지나 제 짐작일 뿐이지만 30퍼센트나 될까요. 그래도 대학원보다는 나을 거예요.
제가 OO 님에게 아카데미를 추천하는 이유가 또 있어요. 지금 엄마, 며느리, 딸의 역할을 감당하는 게 버겁다고 하셨잖아요. 그만큼 공부할 시간이 많지 않으실 텐데요, 그러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 해요. 그런데 대학원에서는 실무만 아니라 이론도 배우거든요. 제 생각에는 없는 시간 쪼개서 굳이 논문 읽고 분석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런 지식이 무익하다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몰라도 번역하는 데 큰 지장은 없고 번역하면서도 충분히 배울 수 있는 거예요. 그걸 지금부터 공부한다고 고생할 필요는 없죠. 그런 면에서 아카데미는 번역의 실전 기술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니까 시간을 효과적으로 쓸 수 있어요.
그렇다고 지금 당장 아카데미 수업을 들으란 말은 아닙니다. 내가 수업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실력이 됐을 때 들어야 해요. 그건 언제냐 하면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내가 원서를 충분히 소화할 만한 실력이 됐을 때입니다.
번역가가 되면 공부에 들어간 비용을 회수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대학원은 글쎄요, 시간이 한참 걸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아카데미 수업비 200만 원 정도는 책 한 권만 번역해도 벌 수 있는 돈이에요.
이렇게 말하니까 제가 무슨 아카데미 예찬론자 같은데, 네, 사실이 그래요. 저는 아카데미를 통해 번역가가 됐고 대학원에서 번역가가 되고 싶지만 길을 못 찾는 분을 많이 봤기 때문에 번역가가 되는 길 중에서 아카데미가 그나마 가장 넓고 편한 길이라 생각해요.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정도면 될 것 같고 제가 추가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다음 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