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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May 19. 2020

번역가가 원문에 밀리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 OOO

제 책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해보고 싶습니다>의 독자에게 보낸 답장의 일부분으로, 앞서 올린 <출판 번역가가 되기 위해 대학원을 가야 할까요?>에서 이어집니다.




번역은 고요한 싸움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정도면 될 것 같고 제가 추가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메일에 ‘보잘 것 없다’, ‘자격지심’, ‘자신에 대한 실망감’, ‘죄책감’, ‘자괴감’ 같은 말을 많이 쓰셨어요. 그래서 저는 지금 OO 님이 주눅이 들고 자신감이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데 번역가가 되려면 그런 마음가짐을 바꾸셔야 해요. 제가 인생의 선배인 OO 님에게 감히 삶의 태도를 논하려는 건 아니고요, 번역가라는 직업에 한정해서 보자면 그런 자기인식이 독이 돼요.


왜냐하면 번역이란 원문과 벌이는 진검승부거든요. 저는 좋은 번역이란 원문의 칼과 번역가의 칼이 팽팽하게 맞붙을 때 나온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원문이 우세하면 번역문은 원문에 매여서 언어만 한국어지 표현과 구조는 영어인 문장이 나올 거예요. 반대로 번역가의 칼이 우세하면 원문을 마구 난도질해서 읽기는 편하지만 원문의 의미와 개성을 날려버린 문장이 나올 테고요.


원문과 막상막하로 싸우려면 자신감이 있어야 해요. 과감하게 칼을 휘둘러야 해요. 그래야 원문의 단어를 사전에 있는 뜻으로만 번역하지 않고 한국어다운 표현으로 적절히 바꿀 수 있어요. 내가 그럴 실력이 된다고,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을 때 ‘이거 이렇게 번역해도 될까? 어디 한번 해보자. 어라 괜찮네?’가 되고, 그럴 때 우리 독자가 읽기 편한 문장이 나와요.


저는 기본적으로 제 실력에 자신이 있어요. 이건 번역 일을 시작할 때부터 그랬어요. 물론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있고 오역도 하죠. 제가 완벽한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제가 받는 돈 이상의 값어치는 한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런 자신감이 번역가로, 또 프리랜서로 10년 넘게 버틴 힘이에요.



자신감을 만드는 꾸준함

그러니까 OO 님도 자신감을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스스로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지금 아무나 못 하는 일을 하고 계시거든요. 제가 OO 님 인스타그램 들어가봤어요. 이름으로 검색하니까 바로 나오더라고요.


보니까 매일 공부한 내용을 사진으로 찍어올리신 지 벌써 80일이 지났네요? 제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공부하는 분량도 적지 않은 것 같아요. 직장인이든 주부든 누가 됐든 간에 그렇게 꾸준히 뭔가를 공부하는 거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저는 그런 꾸준함이 결국에는 빛을 발할 거라고 믿어요.


제가 이번에 책 펀딩을 하면서 후원자 10분에게 번역 첨삭 기회를 드렸어요. 이제 첨삭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데요, 한 분이 첨삭 결과를 받고 저한테 말했어요. 앞서 몇 권의 책을 번역하면서 원문의 뉘앙스를 파악하는 눈이 제일 부족하다고 느꼈는데 제가 총평에서 뉘앙스를 잘 잡아낸다고 써서 보람을 느꼈다고요. 몇 개월간 읽기 연습을 중점적으로 하셨대요.


사실 영어도 번역도 실력이 꾸준히 늘진 않아요. 아니, 꾸준히 느는데 그게 꾸준히 느껴지진 않아요. 한참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내가 이만큼이나 왔구나 알게 되죠. OO 님도 아마 지금 하는 공부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고 지치기도 할 거예요. 하지만 꾸준히 하면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뭐라도 되겠지. 네, 뭐라도 되겠죠.



꾸준히 쓸 것

나이가 많다고, 지방대 나왔다고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번역은 그런 것과 아무 상관이 없거든요. 실력만 있으면 이기는 게임이에요.


다만 제가 한 가지 권하고 싶은 공부 방법이 있어요. 꾸준히 글을 쓰셨으면 좋겠어요. 번역도 결국은 글쓰기니까 글솜씨가 성패를 좌우하거든요. 기왕이면 온라인에 글을 쓰시고 거기서 다른 이용자들과 교류하셨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출판계에서 주 독자층으로 삼는 집단이 2-30대 여성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들의 언어를 알아야 해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언어도 나이가 들어요. ‘노티’가 나는 거죠. 그걸 막으려면 젊은 세대가 쓰는 말을 쓸 수 있어야 하고, 그러자면 SNS 활동이 가장 편한 길이에요.


이미 인스타를 하고 계시니까 그걸 좀 더 활용해보세요. 저도 요즘 인스타에 제가 읽은 책을 소개하면서 기존에 쓰던 글과 조금 다른 느낌의 글을 쓰고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쓸 수 있는 문장의 폭이 더욱 넓어졌어요.


팁을 하나 드리자면 글을 쓸 때 말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써보세요. 제가 이번에 첨삭하면서 느낀 건데 많은 분이 번역을 하면 문장이 딱딱하고 건조해져요. 이건 글을 쓴다고 생각하지 않고 말을 한다는 느낌으로 문장을 쓰는 버릇이 들면 극복 가능합니다. 제가 해봐서 알아요.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해보고 싶습니다: 어느 젊은 번역가의 생존 습관> 구매 링크 (예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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