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하이라이트 Dec 06. 2021

출판 번역가로 자리 잡기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네이버 주간번역가 카페에 올라온 질문에 제가 한 답변입니다. 질문자의 동의를 얻어 질문과 함께 게시합니다.


1. 출판  일감의 양이 영상에 비해 적은  맞나요? 앞으로도 그럴까요?

정확한 통계가 없어 현황은 알 수 없지만 성장세만 보자면 영상 번역 쪽이 월등해 보입니다. 이번에 디즈니 플러스가 진출했고 내년에는 HBO 맥스도 들어올 예정이라 넷플릭스까지 더해서 3대 OTT에서 나오는 번역 물량이 꽤 많을 거예요. 반면에 출판 시장은 이미 오랫동안 정체 중이기 때문에 번역 일감이 크게 늘어날 것 같진 않습니다.



2. 출판 쪽이 진입하기도 상대적으로 힘든가요?

제가 영상 번역을 경험해 보지 않아서 출판 번역만 놓고 말하자면 예전에 비해서는 진입 장벽이 낮아졌습니다. 번역 아카데미를 통해서 번역가가 될 수 있는 길이 생겼거든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전에 정말 좁았던 문이 아주 조금 더 열린 수준이라 여전히 번역가가 되긴 어려운 일입니다. 아카데미 수강생도 워낙 많아서 일단 그 안에서 경쟁해야 할 정도니까요.



3. 자리를 잡으면 지속적으로 일감을 받을  있는지요?

자리를 잡는다는 건 업계에서 실력을 인정받는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네요. 출판계의 경우, 제가 보기에는 영한 번역 기준으로 장당 4,000원의 번역료를 받으면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장당 4,000원은 출판사가 번역에 공을 들일 때 쓰는 돈이거든요. 제가 아는 편집자 분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그분도 동의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지금 4,000원 넘게 받고 있고 꾸준히 번역을 의뢰하는 출판사들이 있지만 일감이 언제 끊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늘 있습니다. 왜냐하면 번역료가 비싸지면 거래할 수 있는 출판사가 그만큼 줄어들어서요. 모든 출판사가 번역에 장당 4,000원 이상 쓰려고 하진 않으니까요. 정말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알 정도로 유명한 번역가가 아니라면 프리랜서라는 직업의 특성상 안정성은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4. 보통 자리를 잡기까지는 얼마나 걸리나요?

저는 장당 4,000원 오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렸어요. 2008년 1월에 장당 3,500원으로 첫 역서를 계약하고 2018년 1월에 처음으로 장당 4,000원에 계약서를 썼거든요. 물론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최소 10년 정도는 생각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5. 출판번역/영상번역을 하고 계신 이유가 궁금해요. (장점)

전 문장을 만드는 게 재미있어요. 어떤 단어들을 어떻게 배치하면 더 이해하기 쉬운 문장, 더 재치 있는 문장, 더 리듬감 있는 문장, 더 한국어다운 문장이 될까 고민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거든요. 학창시절에 문과지만 수학은 좋아했는데 그게 문제를 보고 내 나름의 해법을 고민해서 답을 맞혔을 때 느끼는 쾌감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번역을 하면서 정말 마음에 드는 번역문이 나오면 딱 그때 그 기분을 느낍니다.


그리고 저는 지적 허영심이 있는데 책 한 권 번역할 때마다 아는 게 늘어나니까 좋아요. 책을 번역한다는 건 그 책을 최소 99퍼센트는 이해한다는 거니까 지식의 폭도 깊이도 늘어나는 게 당연하겠죠.



6. 출판번역/영상번역을 하려면 이것만큼은 각오해야 한다! 하는  있나요? (단점)

한마디로 돈이 안 됩니다. 제가 지금 장당 4,000원대 중반을 받고 있어요. 이 정도면 업계에서 결코 적게 받는 게 아닌데도 벌이가 시원찮습니다. 내가 들이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보수가 짜요. 더군다나 이 직업은 공을 들이면 들일수록 벌이가 깎이는 구조입니다. 시간이 아니라 분량으로 보수가 산정되니까 같은 시간에 되도록 많은 분량을 번역하는 게 더 이득이죠. 그런데 돈을 많이 받으면 그만큼 좋은 품질을 보장해야 하고, 또 글 쓰는 사람들 다 그렇겠지만 기왕이면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애초에 수익성이 좋지도 않은데 거기다가 문장 하나하나 고민해서 번역하다 보면 벌이가 좋아질 수가 없죠.


돈 문제는 거의 모든 출판 번역가가 하는 말이에요. 오죽하면 얼마 전에 번역가 조영학 선배가 신문 칼럼에서 이런 말까지 했겠어요.


출판 번역이 왜 자꾸 뒷걸음질치는지는 나를 보면 안다. 20년 동안 90권 넘게 번역을 했지만 지금도 한 달 수익이 200만 원에 미치지 못한다. 그나마 제법 잘나간다는 내가 그럴진대 누가 이 일을 직업으로 삼으려 하겠는가. 날림 번역으로도 먹고살기 어려운 판에 어느 누가 소명의식을 갖고 작업에 임하겠는가. (<어느 날 번역가가 모두 사라진다면>, 서울신문, 2021년 11월 15일)


돈 생각하면 출판 번역은 못할 짓이에요. 이것만으로 생계를 꾸린다면 혼자 살면 가능할지 몰라도 딸린 식구가 있다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맞벌이, 재테크, 투잡 중 최소 하나는 필수라고 생각해야 해요. 씁쓸하지만 현실이 그렇습니다.


유튜브 Jane Kim 채널에 들어가면 저를 포함해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번역가들의 인터뷰가 올라와 있어요. 찬찬히 보시면 분명히 도움이 될 거예요.

매거진의 이전글 노력할수록 벌이가 줄어드는 직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