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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Mar 14. 2023

만년필과 인생의 상관관계

<제 만년필 좀 살려 주시겠습니까?> (김덕래, 젤리클, 2022)


만년필은 구시대의 유산일지 모른다. 18세기에 탄생한 만년필은 잉크를 수시로 채워야 하고 종종 세척을 해줘야 하며 혹시라도 떨어뜨리면 망가지기 쉬운, 한마디로 손이 많이 가는 필기구라 20세기에 굳이 관리하지 않아도 잘 써지는 볼펜이 탄생하자 몰락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그 시기를 버티고 만년필이 지금도 하나의 산업으로 건재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렇게 정성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정성을 들여 뭔가를 간직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래서 식물을 기르고, 책을 수집하고, 구태여 자기 손으로 차를 닦는다. 어쩌면 애써 아이나 반려동물을 키우는 이유도 그처럼 아끼며 지켜야 할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분명 디지털 기기가 읽고 쓰는 도구로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시대다. 그럼에도 종이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그 물성을, 아날로그 도구가 주는 촉감과 정서를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종이 위에서 우둘투둘한 바위를 긁듯 서걱이면서, 혹은 버터를 칠한 바닥에서 춤을 추듯 미끄러지면서 잉크를 흘리는 만년필도 같은 이유로 오늘도 많은 애호가를 탄생시키고 있다.


그 대열에 한 달 전쯤 합류한 나는 마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만년필의 마력에 빠졌다. 그간은 오로지 컴퓨터와 휴대폰으로만 글을 썼다. 악필인 데다 번거롭고 느린 것을 싫어해서 굳이 힘주어 펜을 쥐고 종이 위에 아무리 빠르다 해도 타이핑보다 더딘 속도로 글씨를 써야 할 이유를 몰랐다. 그러나 요즘은 수시로 책상 앞에 앉아서, 그리고 그럴 여건이 안 될 때는, 예를 들어 아이가 자는 동안 자기 곁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할 때는 그 옆에 엎드려서라도 종이 노트에 만년필로 글을 쓴다. 종이와 촉이 마찰할 때 손으로 느껴지는 미세한 흔들림과 귀에 들리는 서걱임이 자꾸만 글을 쓰게 만든다.


그동안 나는 누군가 나를 ‘작가'라고 부르면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이유를 지금까지는 저서를 한 권 밖에 출간하지 못한 내 애매한 입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매일 글을 쓰는 버릇이 들고 나니 알겠다. 스스로 작가다운 삶을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작가로 불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음을. 매일 쓰지 않는데 어떻게 나를 작가로 인정할 수 있겠냐는 자의식이 꿈틀댄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작가적 삶에 한 뼘쯤 발을 걸친 듯하다.


이 책은 이제 나도 그 무리 중 하나가 된 만년필 애호가들을 위해 망가진 만년필을 고쳐주는, 국내에 몇 안 되는 만년필 수리공의 기록이다. 무슨 복잡한 기계 장치도 아니고 얼핏 단순해 보이는 만년필을 고치는 이야기로 책 한 권 분량이 나올까 싶지만 책을 읽어 보면 만년필은 제법 정교한 도구다. 저자는 약 30개 브랜드의 만년필을 수리한 사연을 이야기하며 각 브랜드의 역사와 특징, 만년필의 원리와 관리법을 설명하는 동시에 자신이 추구하는 인생의 태도를 조곤조곤 설명한다.


그는 당장 무언가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시간과 정성을 쏟으면 우리는 서서히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으며, 만년필을 쓸 때처럼 몸에서 힘을 빼면 생각이 유연해진다고, 그리고 펜을 쥐고 종이에 쓰는 행위가 서서히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럴수록 우리 인생이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은 없을지언정 깊어진다고, 그런 자세로 누구나 지금을 전성기로 만들 수 있다고, 만년필을 고치는 손끝에 내내 집중하다가 문득문득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보는 사람처럼 말한다.
  

저자는 만년필을 반려견에 비유한다. 나이가 들수록 그동안 함께 쓴 이야기 때문에 정이 들고 더더욱 소중해지는 존재. 더군다나 만년필은 관리만 잘하면 100년도 거뜬히 쓴다니 이토록 멋진 반려물이 또 있을까.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두 번째 만년필로 곧장 15~ 20만 원쯤 하는 모델을 들일 생각이었다. 값나가는 펜일수록 더 잘 써질 것 같고 '브랜드빨'로 제법 폼도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년필에서 중요한 것은 가격도 브랜드도 아니고 모든 만년필은 당연히 잘 써진다는 그의 말에 우선 16,000짜리 중국산 만년필을 주문해 내게 맞는 촉의 크기와 디자인이 무엇인지 시험해봤다. 곧이어 세 번째 만년필은 중고로 45,000원에 들였다. 첫 만년필은 23,000원이었다. 세 자루의 총구입가가 중급 모델 한 자루 가격이 안 된다.


다만 만년필 2호와 3호는 아쉬움이 있어 다음번에는 더 비싼 제품을 중고로 들이기 위해 각 장터에 키워드 알림을 등록해놨다. 나를 만년필의 세계로 인도한 조경국 작가는 써보고 싶은 제품이 있으면 우선 중고로 구입하는 게 알뜰한 문구 생활의 비결이라고 했다.


언젠가 나도 반려만년필을 찾아 오래도록 쓰다가 누군가에게 내 망가진 만년필을 제발 좀 살려 달라고 부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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