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웨코 페르케오, 홍디안 920, 세일러 프로피트 캐주얼, 워터맨 까렌
지난달에 만년필에 입문하고 보름 동안 내리 세 자루를 질렀다.
차례대로 카웨코 페르케오(X대림미술관), 홍디안 920, 세일러 프로피트 캐주얼. 각각 단평을 해보자면
+부드럽게 사각거리는 필감. 마치 매끈한 바위 위에 글씨를 쓰는 느낌!
+알록달록 예쁘다.
-중후한 느낌이 없다. 알록달록한데 플라스틱 재질이라 장난감처럼 보인다.
-글씨가 생각보다 굵게 써진다.
부드럽게 종이를 긁는 페르케오의 손맛에 반해서 만년필의 매력에 빠졌다. 하지만 왠지 40대 남성이 쓰기엔 가벼워 보이고 평소에 글씨를 작게 쓰는 내 기준에는 생각보다 잉크가 두껍게 나와서 다음 만년필을 들이게 된다.
+가격에 비해 훨씬 고급스러운 느낌. 금장이 로즈골드라 여성스럽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무게가 적당히 묵직하니 좋다.
-EF닙이지만 페르케오 F닙과 비슷한 굵기로 글씨가 써진다.
-종이에 따라 헛발질이 심하다.
헛발질(닙이 종이에 닿았으나 획이 그어지지 않는 것)이 심하단 이유(혹은 핑계)로 나는 또 다른 만년필을 찾아 나선다. 이때부터 중고나라, 번개장터, 당근마켓에 “만년필 ef”, “워터맨 ef”, “m200 ef” 등 십수 가지 키워드 알림을 걸어놓았다. 말했듯이 세필파라 F닙보다 가는 EF닙 위주로. 종일 알림이 와서 수시로 장터를 들락였다. 그렇게 해서 건진 게
-고급스러운 느낌이 홍디안 920보다 못함
-필감은…… 바늘이니? 조금만 힘주면 종이 찢어질 듯.
+글씨는 볼펜 0.3~0.4밀리 정도로 매우 가늘게 써진다.
셋 중에서 제일 비싼 기종이라 기대를 많이 했던지 다소 실망스러웠다. 특히 거친 필감이. 닙이 워낙 가늘어서 그런 건지, 제조사 특성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내 취향엔 페르케오가 제일이었다.
이렇게 셋 다 어디 하나씩 부족해서 신품과 중고를 가리지 않고 계속 다른 모델을 탐색한다. 보름 사이에 세 자루나 질렀으면 이제 그만하라는 마음의 소리를 애써 무시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11번가 아마존에 워터맨 까렌 딜이 뜬다. 직구품은 보증서가 없어서 국내에서 AS 받기가 어렵다기에 이걸 살까, 비슷한 가격에 같은 회사의 하위 기종인 엑스퍼트3를 살까 고민했지만 네이버 카페 <문방삼우> 회원들에게 물어보니 거의 만장일치로 까렌을 추천했다. “어차피 둘 다 들이게 될 텐데요 뭘”이라는 덕담(?)과 함께.
또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은 아마존에서는 EF닙이 아닌 F닙만 판매한단 것이었다. 더욱이 까렌 F닙은 비교적 굵은 편이란 말까지 들었다. 이런 고민의 해법은 모닝페이지에서 나왔다. 나는 창조력을 키우기 위해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종이에 의식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모닝페이지를 작성하는데, 어느 날 모닝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창조적인 해법을 적게 된 것이다.
EF닙은 F닙에 비해 신품이든 중고든 구하기 어렵다.
특히 할인가로 구하긴 더 어렵다.
그러면 내가 F닙에 맞게 글씨를 키우면 되겠네?
기막힌 해결책(혹은 핑계)을 찾은 나는 즉각 11번가 아마존에서 까렌을 주문한다. 직구가 약 18만 원. 3개월 무이자 할부. 국내가는 약 34만 원인 제품이다. 기존에 쓰던 기종들에 비해 가격이 확 뛰었다. 비싼 기종을 구입해서 이제 그만 지름을 끊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다림 끝에 드디어 배송이 온다는 택배사 문자가 왔는데 아니, 뭐? 내용물이 파커 듀오폴드 센테니얼이라고? 국내가 55만 원짜리?! 설마 진짜 듀오폴드가 들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대인배 아마존이 그걸 그냥 가지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제발 들어 있어! 제발 가지라고 해!)
그런 기대를 품고 종일 기다렸던 택배에는…….
실망감은 곧 포장과 함께 뜯겨나갔다. 고급스러운 외관과 묵직한 무게감. 딱 내가 바라던 만년필이었다.
급히 바지에 비벼 닦은 손으로 캡을 열고 배럴을 분리해 동봉된 카트리지를 꽂고 떨리는 숨결에 맞춰 글씨를 써보니 예상대로 굵게 써졌다. 하지만 이제부터 큰 글씨를 쓰기로 다짐한 나에겐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까렌의 필감은 이전의 세 기종과 전혀 다르고 특이하다. 손으로 느껴지기는 부드럽다. 미끄럽게 굴러간다. 그런데 귀에는 사각대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어디서 효과음을 튼 것처럼 손으로 느껴지는 감각과 귀에 들리는 소리가 살짝 다르다. 그 이질감이 싫진 않다. 비싼 돈 주고 샀으니까 자기합리화인지도 모른다.
닙이 굵어서인지 잉크가 살짝 넘친다 싶을 정도로 잘 나오는 것도 앞서 구입한 기종들과 차이점이다. 특히 프로피트 캐주얼은 잉크가 인색하게 나온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까렌은 반대로 후하게 흘리는 느낌이다.
디자인을 보자면 까렌은 닙이 그립부에 감싸인 형태라 고급스러우면서도 개성 있다.
총평하자면 18만 원이라는 가격을 생각하면 디자인, 무게, 필감 모두 만족스럽다. 다만 홍디안 920만큼은 아니어도 종종 헛발질이 있는데 이건 좀 더 써봐야 알 것 같다. 이제 막 만년필에 입문해서 파지법이나 필압이 맞지 않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아직 펜이 길들지 않아서이거나.
까렌을 받고 각종 장터에 걸어놓았던 키워드 알림을 모조리 해제했다. 아직 써보고 싶은 브랜드와 제품이 많지만 일단은 여기서 만족하자는 다짐으로.
그러고는 또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소유성X산리오 시나모롤 만년필을 지르고 장터에 파커 소네트가 좋은 가격에 떠서 사느냐 마느냐를 고민하고 있으니 이 길의 끝은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