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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Apr 12. 2023

흠이 흠이 되지 않는 가죽과 만년필과 당신

장바구니 앞의 망설임이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무료할까.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살까 말까 고민하다 마침내 계산대로 향하거나 결제 버튼을 누를 때 온몸에 전해지는 찌릿한 쾌감만큼 자극적인 게 우리 삶에 얼마나 될까. 편견일지 몰라도 부잣집 자식들이 도박, 마약, 섹스에 많이 빠지는 이유도 여기 있지 않을까. 뭐든 내키는 대로 다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 고민 끝의 구매가 주는 것과 같은 쾌감을 느끼기 어려워서 그런 것을 탐닉하는 게 아닐까.


최근에 나는 돌아서면 생각나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헤비츠에서 만드는 천연가죽 만년필 트레이를 구입했다. 만년필 한 자루를 놓을 수 있게 책갈피보다 조금 크게 만들어진 납작한 가죽판이다. 가격은 25,000원으로 꼭 필요하진 않았다.


만년필을 둘 곳이 필요하긴 했다. 매번 파우치에서 꺼내 쓰긴 불편하고 그렇다고 그냥 책상 위에 두면 굴러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년필은 떨어지면 작살난다. 촉이 무척 얇아서 충격에 약하기 때문이다. 내 1호 만년필인 카웨코 페르케오는 두 번이나 낙하했음에도 멀쩡하긴 하지만.


트레이가 필요했지만 꼭 천연가죽이어야 하진 않았다. 인조 가죽, 실리콘, 플라스틱 재질은 그 반값으로 사고도 남았다. 그러나 나는 천연가죽으로 사고 싶었다. 그래서 가성비와 가심비를 저울질하다 후자로 기울었다. 어차피 내 용돈으로 구입하는 것이니 집안 경제에 폐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마침 최근에 용돈도 올랐겠다 내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지출하기로 했다.


가죽은 가죽인데 한 자루만 놓는 트레이로 할 것이냐, 여러 자루를 넣을 수 있는 원통형 트레이로 할 것이냐 하는 고민도 겹쳐 생각이 길어졌다. 그렇게 일주일을 심사숙고해 주문한 나의 소중한 만년필 트레이는 이제 내 책상에서 당당히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 25,000원 내고 매일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면 싸게 친 거다.


그러면 왜 굳이 천연가죽인가. 나는 그 특유의 부들부들한 감촉과 따뜻하고 고급스러운 질감을 좋아한다. 플라스틱은 딱딱하고 차갑고 저렴하게 느껴지고 실리콘과 인조가죽도 고급감이 부족하다. 철제와 원목은 고급스럽지만 딱딱하다.


하지만 천연가죽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세월의 흔적조차 아름답게 남기 때문이다. 가죽은 쓸수록 때가 타고 흠집이 난다. 그런데 이게 못나 보이지가 않는다. 그렇게 때와 흠집이 생겨야 오히려 정말 내 것이 된다. 같은 재료와 디자인으로 만들었어도 남들에겐 없는 디자인이 완성되는 것이다.


흠이 개성이 되고 아끼는 이유가 되는 것, 그게 천연가죽 제품의 매력이다.


이번에 산 트레이 외에 나는 오롬에서 나온 엘크 가죽 3구 파우치를 갖고 있다. 정가는 15만 원으로 다소 부담스러워 하단 차에 중고장터에 딱 반값에 올라온 물건이 있어서 누가 먼저 채갈세라 얼른 샀는데 받아보니 사진으로 볼 때보다 사용감이 많았다. 여기저기 상처가 나고 접히는 부분은 깊이 자국이 났다. 하지만 어차피 내가 써도 그렇게 됐을 거라고, 가죽은 흠이 곧 아름다움이라고 미화하며 그냥 쓰기로 했다. 만년필만 잘 보관된다면야.


(좌)헤비츠 트레이와 마존 A1 (우)오롬 3구 파우치


요즘 나는 만년필을 어떻게 보관해야 하나 고민이다. 서랍이나 펜꽂이에 여러 자루를 같이 넣으면 자기들끼리 부딪혀 흠집이 날 것 같고, 그렇다고 저마다 분리된 공간이 있는 파우치에 보관하자니 매번 파우치를 열고 꺼내서 쓰고 다시 넣고 닫아야 하는 불편이 따른다. 네이버 문방삼우 카페에 이런 고민을 토로하며 선배들의 보관법을 물었더니 뜻밖에도 수십 개의 댓글이 달렸는데 종합하자면 "함부로 다루진 않지만 그렇다고 모시고 살진 않는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면서 또 많이 하는 말이 어차피 흠집은 생기게 되어 있고 그게 곧 내 만년필이라는 증거라는 것이었다.


아하, 만년필도 가죽과 같구나. 흠집이 곧 개성이구나.


생각해 보니 오래 쓰는 물건에 흠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흠을 흠잡으면 문제가 되지만 나와 함께한 세월의 흔적이라 생각하면 애틋해진다.




마흔이 넘은 나는 요즘 인간관계에서 그런 애틋함이 그립다. 원래도 사람들과 두루두루 사귀는 성격이 아닌데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서 5년이 넘도록 일과 육아에만 메이다 보니 이젠 절친했던 친구들과도 일 년에 한두 번 보면 많이 보는 사이가 됐고, 그 외에는 얼굴 볼 일이 없다 보니 연락이 많이 끊겼다.


그래서 10~20대 시절에 자주 만나며 자연스럽게 서로 흠을 보여줬고 또 종종 오해와 실수로 서로에게 흠을 내고 다시 보듬었던 사람들이 그립다. 성격 탓인지 모르겠지만 나이가 드니까 그렇게 흠집 속에 추억이 박힌 관계를 맺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내게는 아내와 아이들이 소중하다. 우리는 매일 부대끼며 서로에게 자연스레 흠을 내고 있다. 특히 만난 지 10년이 넘은 아내와 나의 관계는 여러 차례의 다툼으로 흠투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일이 걸릴지언정 모든 흠집을 아물리며 오늘에 이르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좋은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 다퉜던 기억도 추억으로 남는다.


가죽도, 만년필도, 사람도 흠이 없으면 내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만년필용 가죽 파우치를 하나 더 주문했다. 이번엔 6구 파우치다. 가격은 알리익스프레스에서 단돈 3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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