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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May 16. 2023

스누피와 정우성(혹은 이정재)과 나

아저씨가 귀여운 다이어리를 써도 될까

야, 저 아저씨 봐라, 저 나이 먹고 저게 뭐냐?


……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섣불리 못 입고 못 사고 못 쓰는 게 점점 늘어난다. 예를 들면 나의 피너츠 다이어리. 찰리 브라운과 스누피가 바위에 기대서 쉬고 우드스톡이 작은 돛단배를 타고 물 위를 떠다니는 풍경이 차분한 색조로 표지를 장식하는 다이어리다. 알라딘에서 2022년 말에 판매한 제품으로 정가는 4,000원. 단, 50,000원 이상 주문 시에만 구입 가능. 순전히 이 다이어리가 갖고 싶어서 5만 원을 꽉꽉 채워 주문했다.




<피너츠>는 나이가 들수록 좋아진다. 그 특유의 나른한 느낌이 좋다. 그 세계에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고민도, 주먹을 꽉 쥐게 하는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피식 웃고 말 말과 행동만 존재하는, 뭐랄까, 이른 여름의 오후 2시쯤에 담장에 늘어진 햇살 같은 세계다.


20년 전의 어느 시기에 나는 문고본으로 나온 영한 대역판 <피너츠>를 사다가 매일 밤 몇 편씩 읽고서 잠이 들었다. 그 나른한 일화들로 하루의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요즘은 아마존에서 산 <피너츠> 완전판 전자책을 밤마다 불 꺼진 방에서 아이를 재우며 역시 나른하게 읽고 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 서랍에는 언젠가 텐바이텐에서 결제 직전에 추천 상품으로 뜬 것을 보고 주문한 피너츠 메모지와, 언젠가 어머니를 서울의 병원에 모시고 갔다가 들른 롯데마트 서울역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꼭지에 찰리 브라운 피규어가 달린 볼펜이 굴러다니고, 내 에어팟 케이스에서는 찰리 브라운이 멋쩍게 웃고, 지금 내 옆에 있는 의자에는 스누피 방석이 깔려 있고, 안방 낮은 옷장 위에서는 찰리 브라운과 친구들이 비틀스의 <애비로드> 커버처럼 걸어가는 북엔드가 아이들의 책을 받치고 있고, 잠깐,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분명히 서재 책장에 작은 스누피와 우드스톡 피규어가 세 개인가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첫째가 가지고 놀더니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


그러니까 어느 날 알라딘 첫 화면에 뜬 피너츠 다이어리를 본 순간, 언제였더라, 다이어리를 마지막으로 썼던 적이, 기억도 안 날 만큼 까마득하네, 그 까마득함을 넘어 50,000원을 꽉 채운 주문을 넣은 게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마침 그때 나는 조경국 작가의 <일기 쓰는 법>을 읽고 일상을 기록하는 행위에 어렴풋이 매력을 느끼던 차였다.




그렇게 내 손에 들어온 이 다이어리는 유감스럽게도 마흔이 넘은 아저씨가 어디 가서 꺼내기엔 다소 부적절해 보였다. 영 멋이 나지 않았다. 내 멋의 기준은 이정재와 정우성이다. 내 또래 아저씨 치고 인생에서 한 시절이나마 그들을 동경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게 그들은 멋진 중년의 표상이다. 얼굴이든 재력이든 몸뚱이든 그들에게 비빌 구석이 전혀 없는 주제에 무엇이든 그들에 대입해서 멋을 판별한다. 정우성과 이정재가 이렇게 한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정우성과 이정재가 공개된 공간에서 이 피너츠 다이어리를 꺼낸다고 하면, 글쎄, 잘생겼으니까 뭘 하든 근사하지 않을까만은, 썩 어울리진 않는다. 그들의 얼굴로도 어떻게 안 된다. 어디 조용한 카페 같은 데 둘이 앉아서


"정재 씨, 이거 이번에 나온 피너츠—"

"우성 씨, 이리 내요. 이제 내 거야."


라고 취향을 공유하는 건 모르겠지만 대놓고 들고 다니는 건 그들에게도 부적절해 보인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 다이어리를 새해가 지난 지 5개월이 되도록 책장에 고이 모셔만 놓았다. 그래서 4,000원이 아까운가 하면, 아니, 오히려 그 몇 배의 효용을 얻었다. 피너츠 다이어리를 못 쓰겠다고 판단한 후 대신 쓸 다이어리를 찾다가 불렛저널이라는, 기성 다이어리 제품을 이용하지 않고 어느 노트에든 편하게 일정과 메모를 기록하는 방법을 알게 되어 일상을 더 체계적으로 계획하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렛저널이란 간단히 말해 자신이 정한 기호로 할 일, 경험, 약속 등을 자유롭게 기록하는 다이어리 혹은 저널 작성법이다. 자세한 내용은 <불렛저널>(라이더 캐롤 저, 최성옥 역, 한빛비즈, 2018)과 <나의 첫 불렛저널>(Marie 저, 김은혜 역, 한빛비즈, 2018)에 설명되어 있다. 전자가 불렛저널의 창시자가 쓴 책이지만 더 간결하게 정리되고 예시가 실린 후자를 추천한다. 굳이 책을 읽지 않고 유튜브에서 관련 영상만 봐도 익힐 수 있는 간단한 기법이다.


나로 말하자면 작년 12월부터 지금까지 반 년째 꾸준히 불렛저널을 기록 중이다. 다이어리도 플래너도 평생 이렇게 꾸준히 쓴 적이 없는 내게 불렛저널이 매력적인 이유는 남이 만든 형식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불렛저널이라는 방법 자체는 남이 만든 형식이긴 하다. 하지만 그 형식을 내가 얼마든지 변형할 수 있고 또 남이 구획한, 그리고 대체로 여성지향적이지 않으면 투박하기 일색인 다이어리 제품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매력이다.


그리고 이 피너츠 다이어리는 나를 불렛저널만 아니라 또 다른 세계에 입문하게 하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계속……


나의 피너츠 굿즈 중 일부. 왼쪽이 문제의 피너츠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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