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하이라이트 Mar 16. 2023

지름은 돌아가신 아버지도 춤추게 한다

"기지배도 아니고 글씨 좀 크게 써라!"


생전에 아버지가 누누이 하던 말씀이다. 공부하라고는 안 해도 글씨는 좀 크게 쓰라고 역정이었다. 요즘이야 글씨로 남녀를 가르는 게 구시대적 사고라고 할지 몰라도 당시는 1990년대, 그러니까 옛날이었다.


아버지는 글씨를 탓했지만 그 속에는 소극적인 아들의 성격에 대한 불만이 담겨 있었다. 소극적인 성격이 필체에도 묻어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더 시원시원한 성격이길, 흔히 생각하는 남자다운 성격이길 바랐다.


그것은 아버지 본인도 소극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소극적이어서 삶에서 이루지 못하고 즐기지 못한 게 많으니까 아들은 그러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나도 첫째가 소극적이고 수줍음을 탈 때마다 이미 그런 성격으로 40여 년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못내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런 성격은 아무래도 머뭇거리다 놓치고 후회하는 일이 많다.


내 글씨는 워낙 작다. 그래서 볼펜도 0.3미리만 쓴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큼직하게 쓰기로 했다. 아버지 생전의 소원대로.


그런 결단의 이유는……


글씨를 작게 쓰면 만년필 선택의 폭이 너무 좁아지기 때문이다. 글씨를 작게 쓰려면 EF촉을 써야 하는데 일제 만년필을 빼고는 EF촉을 장착한 제품의 유통 물량이 많지 않다 보니 신품도 중고도 구하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어제부터 살까 말까 고민했던 11마존의 워터맨 까렌은 F촉만 팔고 있었다.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EF촉을 고집했는데 오늘 아침에 모닝페이지를 쓰다 비로소 깨달았다. 글씨를 크게 쓰면 가장 흔하게 판매되는 F촉이나 그보다 더 두꺼운 촉을 써도 되겠구나! 그러면 그만큼 선택할 수 있는 제품이 늘어나겠구나.


그래서 오늘부터 크게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11마존에서 워터맨 까렌을 주문했다. 무이자 할부 3개월로.


이렇게 지름은 25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한도 풀어드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름마왕을 베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