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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Jan 26. 2019

(내) 번역은 원문의 노예

흔히 번역을 제2의 창작이라고 한다. 한데 다른 사람의 번역은 몰라도 내 번역에는 감히 '창작'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지 못하겠다. 모름지기 창작이란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정신세계에는 존재했을지 몰라도 아직 물질세계에는 나온 적이 없는 것을 내놓는 행위다.


그런데 내 번역은 그렇게 고차원적이지 않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다른 다른 언어로 바꿀 뿐이다. 어떤 생각에 입힌 영어라는 포장을 벗기고 한국어로 최대한 비슷하게 재포장하는 것이다. 좀 그럴듯하게 말하자면 해체와 재결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내가 번역가가 된 이유도 이 단어 저 단어를 저울질하며 문장을 만드는 것은 좋아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짓은 골치 아프고 귀찮았기 때문이다.


내 번역에는 오히려 원문의 노예라는 말이 걸맞다. 내 번역은 원문에 속박되어 있다.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할 때도 있지만 원문의 문체와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다.


최근에 내가 번역한 책의 첫 문단이다.


“I don't have enough time,” a common complaint heard in companies of all sizes, voiced by employees at all levels—from managers to administrative assistants, from vice presidents, lawyers, and professors to CFOs and CEOs. No type of company is exempt from this predicament, whether it's a huge corporation with tens of thousands of employees, a smaller business with a couple hundred employees, or a home-based business with just one entrepreneur, consultant, or freelancer at the helm.


그대로 옮기자면 이렇다.


“시간이 부족해.” 회사가 크고 작고를 떠나서 관리자, 비서, 부사장, 변호사, 교수, CFO, CEO 등 모든 직급의 임직원에게서 흔히 나오는 불만의 목소리다. 수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기업도, 직원이 200명인 중소기업도, 한 명의 사업가, 컨설턴트, 프리랜서가 자택에서 운영하는 1인 기업도 모두 이 문제로 애를 먹는다.


나는 이렇게 번역했다.


“시간이 부족해.” 회사가 크고 작고를 떠나서 말단 직원부터 팀장, 부사장, 변호사, 자문역, CFO, CEO 등 모든 직급의 임직원에게서 흔히 나오는 불만의 목소리다. 수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기업도, 직원이 200명인 중소기업도, 한 명의 사업가, 컨설턴트, 프리랜서가 자택에서 운영하는 1인 기업도 모두 이 시간 부족이라는 문제로 애를 먹는다.


보다시피 밑줄을 쳐놓은 "from managers to administrative assistants, from vice presidents, lawyers, and professors to CFOs and CEOs"는 원래 "관리자, 비서, 부사장, 변호사, 교수, CFO, CEO 등"이라고 번역해야 하지만 "말단 직원부터 팀장, 부사장, 변호사, 자문역, CFO, CEO 등"이라고 번역했다. "관리자, 비서"를 "말단 직원부터 팀장"으로 바꾼 것은 "모든 직급"을 나타내기 위해서이고 "교수"가 "자문역"으로 바뀐 것은 회사 이야기에 교수가 불쑥 등장하는 게 좀 뜬금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창작이 아니라 원저자의 글을 더 잘 읽히도록 조금 다듬어주는, 말하자면 원판을 더 예쁘게 만들어주는 '마사지'에 불과하다. 내가 번역에서 발휘하는 융통성이랄까, 창조성은 딱 거기까지다. 제2의 창작이라고 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할 것이다.


"시간이 없어, 시간이!" 오늘도 곳곳에서 사람들의 탄식이 쏟아진다. 시간 부족은 대기업, 중소기업, 1인 기업을 가리지 않고 모든 조직에서 말단 직원부터 CEO에 이르기까지 모든 직급에 만연한 고질병이다.


내 기준에서는 이런 글이 더 좋다. 말이든 글이든 '용건만 간단히' 주의자라 뺄 수 있는 것은 다 빼버리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글을 쓸 때 이야기고 번역할 때는 원문을 함부로 줄이거나 늘리지 말고 최대한 원형 그대로 보존하자는 주의다. 편집 과정에서 잘리고 덧붙고 달라지는 부분이 있을 수는 있어도 그것은 편집자의 몫이지, 번역자가 할 일은 아니라고, 도리어 편집자가 필요하면 그렇게 글을 오리고 붙일 수 있도록 최대한 원문에 밀착한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말했다시피 최소한의 융통성은 발휘한다. 위의 예시에서 보듯이 독자가 읽으면서 흐름이 원활하지 않다고 느낄 만한 부분은 저자의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수준에서 살짝 다듬는다. 위의 책은 저자가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곳곳에 그런 문장이 있어서 마사지를 제법 했다. 단, 단어나 구문의 수준에서 표현을 살짝 변경하는 수준이지 글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치진 않았다.


이것은 무척 답답한 일이다. 내 스타일이 아닌 스타일로 글을 쓰자면 답답할 수밖에 없다. 번역을 하다 보면 '이건 이렇게 표현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텐데……', '이 부분은 날리고 여기에 이런 내용을 덧붙이면 더 읽을 맛이 날 텐데!' 하고 내 식대로 쓰고 싶은 충동을 종종 느낀다. 그런 충동은 무조건 억누른다. 나는 원저자의 문장을 한국어로 바꾸는 사람일 뿐 편집하거나 개정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혹시 위에서 예로 든 번역문처럼 소소하게 표현을 고치는 것도 자의적인 판단에 의한 월권행위라고 한다면 그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저자의 문체와 의도가 훼손되지 않았으니 저 정도는 저자와 독자에 대한 번역가의 충정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내 식대로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때가 생각난다. 건강한 마음으로 사는 법을 이야기하는 자기계발서를 번역할 때였는데, 본문에 "자신을 언어로 폭행한다"라는 말이 자주 나왔다. 문득 '발길질'을 변형한 '말길질'이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그렇게 쓰면 글자 수도 줄고 읽는 맛도 좋아질 것 같았다. 그래서 초고에는 그렇게 써봤다. 하지만 검토 과정에서 저자가 새로운 표현을 만든 것도 아닌데 번역가가 함부로 말을 지어내는 게 주제넘은 짓이라 판단해 모두 원래 표현으로 되돌려놓았다.


그 책은 그래야 했다. 대부분의 책이 그렇다. 번역가가 글쟁이로서 느끼는 충동을 시원하게 배설할 수 있는 책은 드물다. 그런 책을 만난다면 큰 행운이다. 내게는 ⟪도둑비서들⟫이라는 소설이 그랬다. 곳곳에 밴 유머를 우리말로 자연스럽게 살리는 게 관건이었다. 그러자면 원문의 표현을 곧이곧대로 옮겨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내 말장난 기술을 총동원해 원문을 내 식으로 좀 손질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저자가 웃음을 주려고 의도한 부분에 한해서.


그래서 이런 번역이 나왔다.


Robert asking me when his peak-lapel tuxedo would be back from the cleaners? "I stole." Robert asking me to research the political donations made by his three o’clock appointment? "I have no morals." Robert just back from Georgia, dropping a bag of peaches onto my desk because he knew how much I loved them? "I could take my own life."


로버트가 세탁 맡긴 피크트라펠 턱시도를 언제쯤 받을 수 있냐고 물었을 때? ‘내가 도둑년이라니!’ 로버트가 3시 약속에서 결정한 정치 후원금에 대해 조사 좀 해보라고 했을 때? ‘난 양심에 털 난 년이야!’ 이제 막 조지아주에서 돌아온 로버트가 내 입맛을 알고 사온 복숭아 한 봉지를 내 책상에 떡하니 내려놓았을 때? ‘죽어, 죽어, 이 년아!’


"Things are going to hell in a handbasket," Robert would have said. His voice was always in my head. I couldn’t help it. So much of my daily energy went to thinking about Robert, thinking as Robert, anticipating his needs, responding to his requests, manifesting his every wish. It wasn’t possible to just turn his voice off at the end of the day. "A couple sandwiches shy of a picnic," he would have called my thinking now. "Crazy as a bull bat."


“생지옥에 빠진 생쥐 꼴이로군”이라고, 로버트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증상이었다. 날마다 로버트를 생각하고 로버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그에게 필요한 것을 헤아리고, 그의 요구에 응하고, 그의 온갖 바람을 실현하느라 젖 먹던 힘까지 쏟아붓는 나였다. 그러니 일과가 끝나고도 그의 목소리를 꺼버릴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면 그는 “어처구니가 한 바구니가 없네” 내지는 “불나방 불나발부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라고 했을 것이다.


Of course I had good stories about him, but if I’d learned anything in my six years of servitude, it was discretion. Robert trusted me because I was good at keeping my mouth shut. ("No ten-gallon mouths around here.")


물론 로버트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야 없지 않았지만 내가 6년에 걸친 노예 생활에서 얻은 교훈이 있다면 자나 깨나 입조심, 이었다. 로버트가 나를 신뢰하는 이유는 입 다물어야 할 때 다물 줄 알았기 때문이다(“여긴 똥통에 빠져도 주둥이만 똥똥 뜰 놈들 천지야”).


아, 다시 봐도 명번역이야. 기왕 자랑하는 것 하나만 더!


Emily fucking Johnson.

에밀리 존슨, 이 똥물에 튀겨먹을 년.


이 책의 번역은, 내 입으로 말하기 좀 그렇지만, 출판사에서도 무척 마음에 들어했고 독자들에게도 호평을 받았다. 작가가 판을 잘 깔아줘서 노예지만 행복했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다시피 그렇게 죽이 척척 맞는 작가 내지는 책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10년이 넘게 수십 권의 책을 번역했지만 그런 책은 채 5권이 안 된다.


그래서 번역을 하다 보면 갑갑하고, 그래서 차라리 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번역을 배울 때 Y선생님이 그랬다. 다들 번역하다 보면 결국에는 자기 책을 쓰고 싶어 진다고. 그때는 아니, 이 편한 일을 놔두고 왜 힘들게 창작을 해, 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말에 공감이 간다. 노예는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노예다. 더욱이 지난 11년 동안 내 번역료가 고작 14퍼센트 인상된 것을 보면(연평균 임금상승률을 계산하면 약 1.27퍼센트로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점점 임금이 줄어든 셈이다) 노예 중에서도 중급 노예는 될 것 같다.


하지만 어쩌랴. 누가 강제로 시킨 일도 아니고 저 좋아서 하는 것을. 꿋꿋이 버텨서 돈 많이 버는 노예가 되거나 다른 일 알아보거나 둘 중 하나지. 그래서 나는 <백수의 왕>에서 밝힌 대로 소설을 쓰려 한다. 그 글을 쓴 게 1년도 더 전인데 아직도 구상 중이라는 핑계로 한 글자도 안 쓰고 있으니 언제 완성될지는 모르지만 어느 날 내가 번역계에서 사라지면 아, 소설이 대박 쳐서 돈 많은 백수가 됐구나, 라고 생각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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