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하려면 영어를 얼마나 잘해야 하나요?”
번역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하는 질문이다. 답은 간단하다.
저런 질문을 안 할 정도가 되면 됩니다.
재수 없다고?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번역가가 되려면 영어를 아주 잘해야 한다. 남의 돈 받고 하는 일인데 당연하다. 그리고 그 정도 실력을 갖춘 사람은 굳이 얼마나 잘해야 하냐고 묻지 않는다. 이미 잘하는데 뭘 더 잘한단 말인가? 자기 실력에 확신이 있다는 말이다.
참, 여기서 말하는 영어 실력이란 영어 독해력이다. 어차피 번역가는 영어로 된 글을 읽기만 하지, 어디 가서 돈 받고 영어로 듣고 말하고 쓸 일은 없으니까 그런 쪽으로는 꼭 유창할 필요 없다. 나도 <번역가라고 다 쏼라쏼라하진 않아요>에서 썼듯이 읽기만 잘한다. 자랑은 아니지만.
자, 그렇다면 독해력에 대한 확신은 어디서 생기는가? 그거야 영어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긴다. 실력이 부족할 때는 한 페이지 읽기도 벅차고 도대체 작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실력이 쌓이면 설령 한국어 책만큼 속도가 나진 않는다 해도 영어 원서가 술술 읽히고 그 내용도 98퍼센트 정도는 이해가 된다.
98퍼센트라고 하는 이유는 저자가 모든 문장을 명쾌하게 쓰지 않은 이상은 독자가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자의 지식이나 소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저자도 사람인지라 허술한 문장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번역할 때 이런 문장을 만나면 보통 저자에게 메일을 보내 물어본다.)
영어 원서를 술술 읽는다는 말은 사전을 절대 보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사전을 안 봐도 될 정도로 어휘력이 풍부하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렇지 않고 사전을 찾으며 읽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번역가는 종일 사전을 끼고 일하는 사람이다.
오히려 사전을 찾는 버릇이 들었다면 번역할 때 도움이 된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듯이 아는 단어도 사전을 뒤져서 혹시 내가 모르던 뜻이 있진 않은지 확인하면 번역의 정확도가 높아진다.
⟪빨간 머리 앤⟫으로 유명한 루시 몽고메리의 소설 ⟪달콤한 나의 블루 캐슬⟫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Then he came tearing downstairs with a club bag in his hand, snatched his hat and coat from the rack, jerked open the street door and rushed down the street in the direction of the station.
밑줄 친 ‘tear’를 보면 ‘초딩도 아는 단어잖아!’라며 눈물을 흘린다는 뜻으로 해석하기 쉽다. 하지만 영어 좀 한다 하는 사람들은 'tear가 동사로 쓰이면 찢는다는 뜻이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 여기서 ‘tear’는 부랴부랴 움직인다는 뜻이다. 책 한 권을 번역하자면 이런 함정을 몇 번씩 만나게 된다.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사전을 찾는 습관이 있어야 한다.
이제 당신이 번역가가 될 만한 영어 실력을 갖췄는지 확인하는 방법이 나왔다. 아직 자기 실력을 모르겠다면 오늘부터 자신이 번역하고 싶은 분야의 영어 책을 딱 5권만 읽어보자. 가령 소설 번역을 하고 싶다면 영어 소설을 5권 읽어보자.
그러면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자신의 독해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내가 영어 실력에 자신이 생긴 것은 동사무소 공익 시절이다. 동사무소는 한가할 때는 무척 한가하다. 그 시간에 뭐라도 생산적인 일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영어 원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래서 2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정확히 세보진 않았지만 30권이 넘는 영어 책을 읽었다. 그러다 보니 복학할 즈음에는 어지간한 책은 다 읽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혹시 자신의 판단을 믿을 수 없다, 누가 평가 좀 해줬으면 좋겠다, 싶으면 번역 수업을 들으면 된다. 단, 번역문을 과제로 제출하고 강사가 첨삭해주는 수업을 선택해야 한다. 그렇게 강사의 평가를 받았을 때 오역에 대한 지적이 많다면 아직 영어 문장을 해석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런 경우에는 강사도 영어 공부를 좀 더 하라고 권할 것이다.
또 내 얘기를 하자면 나는 2007년에 바른번역에서 J선생님에게 수업을 들을 때 문장의 해석에 대해서는 거의 지적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또 재수 없게 들릴 수 있겠지만, 바로 일을 시작해도 손색이 없겠다는 평을 받았다.
솔직히 나도 이전에는 내 영어 실력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다. 잘하긴 하는 것 같은데 과연 책 한 권을 맡아서 무리 없이 번역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수업을 통해 선생님에게 객관적인 평가를 받고 나니 그런 두려움이 많이 해소됐다.
참고로 지금도 책 의뢰가 들어오면 내가 다 번역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그런데 그것은 내 실력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저자의 글솜씨에 대한 걱정이다. 글을 이상하게 써놔서 해석이 잘 안 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다. 다행히 10년 넘게 일하면서 도중에 포기할 만큼 이상한 책은 없었다.
자, 당신의 궁금증도 풀고 내 자랑도 했으니 이만 정리하자. 번역가가 되려면? 애초에 영어 실력은 고민거리가 아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