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모로 손절매를 잘하는 인생이 잘 사는 인생이다. 손절매란 경제학의 용어(주가가 하락할 것이 예상될 때 매입가격 이하로 손해를 보고 주식을 파는 일)이지만 그 범위를 떠나 인생에 있어서도 적용이 잘되는 개념이다. 이를테면 과거의 상처, 좌절, 실패의 경험 등 딱지가 진 인생의 모든 지점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도 손절매라는 개념은 그 해법을 제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매몰비용을 받아드려야 한다는 것과도 아마 비슷한 궤를 가질 것으로 보인다.
2만원으로 오를 것이라 예상해 1만원에 산 주식이 오천원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해보자. 투입한 비용의 절반이 날아갔다. 하지만 아무리 분석해봐도 주식이 다시 오를 확률은 희박하다고 판단이 된다. 손절매란 이 상황에서의 가장 현명한 행동을 말한다. 이미 발생한 5천원의 손해를 받아들이고 그 시점에서 주식을 팔아 남은 5천원이라도 건져내는 것. 더 큰 손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스스로 5천원의 손해를 결정짓는 일이다. 이 대목에서 받아들이기 가장 어려운 점이 바로 스스로 손해를 결정짓는다는 자의적 행동이다. 머릿속에는 아주 작은 확률로나마 주식이 처음 예상한 것처럼 2만원으로 다시 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남아있는데 내 손으로 5천원의 손해를 결정짓는다?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주식이 다시 2배로 오를 일이 얼마나 작은 확률인지를 객곽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갚어치가 떨어질 것이 확실시 되는 패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아마 없을 것이다.
비단 경제학의 문제를 떠나서 이러한 상황이 말해주는 인생의 본질은 무엇일까? 불교의 가르침을 빌려오면 그 해답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본다. 불교에서는 과거나 미래에 얾매여 사는 것을 미련이라 하여 현재의 나의 존재를 똑바로 쳐다보고 순간에 충실히 사는 것을 중요시한다. 예를 들면 어떤 일이든 그만둘 수 있고 동시에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는 가르침이나, 만났을 때 헤어질 준비를 해야하며 헤어질 때 다시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상황이란 언제든 변할 수 있으며 때문에 어떤 선택이 옳은 선택인지를 판가름하는 일은 전적으로 그 변화하는 상황에 달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좋았던 인연이 멀어져가는 것도 받아들여야 하며 반대로 멀여졌던 인연이 다시 가까워지는 것도 받아들여야 함을 이야기 하는 것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어떤 선택이 옳은 선택인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개념이란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본론으로 돌아와 보자. 우리는 인생에서 맞이하는 모든 아픔을 어떤 자세로 바라보고 받아들여야 할까? 인생을 뒤흔들어버린 너무 큰 상처들, 이를테면 입시의 실패, 부모 형제와의 갈등. 꿈의 좌절. 불운한 인생과 기구한 운명, 잘해보고자 달려들었지만 그 선했던 의도만큼 따라와주지 못한 무수히 많은 부족의 결과물들. 그런 수 많은 상처들은 안타깝지만 이미 치유될 타이밍을 놓쳐버린 딱지진 과거들이다. 마치 1만원에 주식을 사지 않은 나 자신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것처럼 상처 받지 않은 나 자신으로 다시 돌아갈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때문에 5천원의 손해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손절매를 행해야 하는 것처럼 내가 받은 상처는 이미 회복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스스로 그 상처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미 딱지가 졌음을 알아야 한다. 회복되지 않을 상처를 회복하겠다며 과거에 얽매여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은 마치 이미 자리잡은 딱지를 자꾸만 떼버리는 것처럼 아픔을 지속시키는 못난 행위일 뿐이다. 값어치가 떨어질 것이 분명한 주식을 손에들고 팔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치유의 집착에서 벗어나 딱지진 상처와 인생의 흠결을 나 자신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겨우 현재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회복할 수 없는 과거를 대하는 가장 현명한 태도는 그 과거와 이별하는 것 뿐이다.
불의의 사고로 팔다리를 잃었지만 보란듯이 살아나가는 많은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착안해야 할 것이 바로 그런 존재들의 삶의 태도다. 팔 한 짝을 잃었다면 그 팔 한 짝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하는 것처럼, 마음 어느 한켠이 잘려나가 온전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면 그 아픈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채워질 수 없는 가슴의 서러움을 채우려 하면 안된다. 완벽해질 수 없음을 이해하고 흠결을 받아드려야한다. 그 흠결을 사랑할 수 없을 지언정 적어도 그것이 죽을 때까지 함께 가야만 하는 동반자라는 것까지는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판단력으로 현재위에 두 발을 디딜 수 있다. 상처 받은 모든 이들이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