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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신뢰한다는 적당한 거리감

관심과 무관심의 사이 어딘가에서 신뢰가 꽃핀다.

by 글객

사람을 신뢰한다는 것은 어떤 개념일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 개념의 정의를 관심과 방관의 중간 격이라 생각해왔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과도한 관심을 가져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신경조차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균형 속에 신뢰라는 중립이 성립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 영역은 꽤 협소해서 신경 쓰지 않으면 언제든 양 극단의 어느 쪽으로 치우치기가 쉽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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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관 <-------> 신뢰 <-------> 간섭


그런 말이 있다. 인간의 자아는 고등학교 시기에 거의 다 성립된다고. 그 이후의 인간은 지식적으로 성장할 순 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본질적으로 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무엇을 문제로 인식할 것인지와 그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방식의 고유함이 이미 성인의 시기로 돌입하면서 하나의 유형으로 자리 잡게 된다는 뜻인데 그 인식과 절차 자체가 한 사람을 규정하는 정체성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방식을 과도하게 관찰하는 것의 위험성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미 한 사람의 인격으로 성장을 마친 누군가와 내가 같은 공간에서 공유된 미션을 이루어 나감에 있어 과정을 너무 바라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난센스를 유발할 수 있다. 한 사람은 '나'라는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상대방에게는 논리가 이미 성립되어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프로세스가 내 입장에서는 보이지 않거나 이해가 되지 않거나 심지어는 잘못돼 보일 위험도 있다. 물론 인간은 언어라는 도구를 이용해 내 안에 있는 것을 상대방의 인식 상으로 전달하는 축복을 받은 존재이지만 언어는 어떤 하나의 필터링이고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전달함과 동시에 무언가를 탈락시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관찰하지 않았으면 존재하지 않았을 불필요한 에너지의 발생을 초래할 수 있다. 공유해야 하는 것은 도출해야만 하는 결과 지점과 그 지점으로 가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 자원이지 과정의 세세함이 아닌 것이다. 과정을 세세하게 관찰할수록 팀원 모두의 관점이 담겨야 할 과업이 한 사람의 가치관에 머문 협작이 될 위험이 있다고 본다. 세상을 바라보는 한 사람의 관점은 설익었을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신뢰란 과정의 자율권의 보장이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보이지 않는 문제 해결 방식이 상대방에게 존재하리라 생각할 수 있는 미덕 속에 조직의 신뢰가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그 방임이 방관의 영역으로 전환되어서는 곤란하다. 말한 것처럼 공유되어야 하는 것은 추구해야 하는 목표지점과 주어져있는 한정된 물질 자원과 시간자원이다. 이에 대한 한 사람과 한 사람의 '논의'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지라 과정에 몰입하게 되면 목표와 자원이라는 '현실'을 잊기가 쉽다. 때문에 서로 간에 주고받는 자극을 통해 현실감을 주기적으로 일깨워주지 않으면 혼자만의 공상을 하기가 쉽다. 이는 최소한의 결실 확보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커뮤니케이션의 한 요소이고 이 절차가 결여되면 팀이란 구조안에서 개개인은 존재의 이유를 잃고 전체적인 항해의 방향도 잃게 될 것이다.


종합적으로 정리해보면 '신뢰'란 지향돼야 하는 지점에 대한 주기적인 공유와 그 과정을 채우는 절차에 대한 일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그 정반대인 과정에 대한 과도한 관심, 그리고 목표지점에 대한 방임이 될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와중에 하는 일마다 일일이 간섭받아야 하는 조직이란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히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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