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이중인격자가 되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글 쓰는 나로 다시 돌아가는 조금은 막막한 시간

by 글객

to Globe
by Logic
from Originality

누구나 독창성이 있다
그것이 논리를 만나면
세상을 만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GLO 해내고 싶다.






1. 죄송하지만 설문 조사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필자의 사무실은 금요일에 오전 근무만 한다는 이전 글의 자랑 아닌 자랑이 무색하게 오늘은 할 일이 많아 오후 4시가 조금 넘어서 퇴근을 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바로 얼마 전 등록한 광화문역 인근의 한 헬스클럽에서 2시간가량 운동을 하고 운동을 마친 후에는 집에 가기 전에 글 한편을 적으로 근처 스타벅스에 왔습니다. '왔습니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필자는 지금 광화문 스타벅스의 3층 한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주변에는 몇 그룹 정도의 손님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조금은 시끄럽게 떠들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설문 조사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실은 저녁 7시가 조금 넘어서 카페에 도착했지만 그 뒤로 몇 시간 동안 글쓰기를 시작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주린 배를 채우려고 '헴 에그 크레페'를 먹느라 그다음에는 오늘 아침 출근길부터 갑자기 보기 시작한 조석 작가의 웹툰 '조의 영역' 시즌2를 보느라고요. 웹툰을 보는 중간에는 자신이 경희대학교 학생이라고 밝힌 한 여자분이 설문조사를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 얼마나 걸리는 일일까요?(나 글 써야 되는데)"라고 물으니 15분 정도 걸린다고 하여 잠시간을 망설이다가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 앞뒤로 인쇄가 된 3,4장 정도 분량의 A4 설문지를 주더군요. 그렇게 '30대 미혼 남성이 독신으로 살려고 하는 이유' 정도의 주제로 볼 수 있는 설문지를 작성했습니다. 작성을 마치고 나서는 그 여성분이 감사의 표시로 작은 사이즈의 하리보 젤리를 저에게 선물했습니다.


사실 혼자 있을 때 이런 설문조사를 부탁받거나 혼자 길을 갈 때 '도를 아십니까' 부대로부터 급습을 받는 일은 그리 유쾌한 상황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마치 평화로운 초원에서 한가로이 누워있다가 갑자기 출현한 맹수를 맞닥뜨리는 어린 사슴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혼자 앉아서 멀뚱히 웹툰을 보는' 사람은 그런 설문조사를 부탁하기에 더 용이한 측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필자가 만약 이미 집중해서 글을 쓰는 와중이었다면 그런 설문조사를 부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글을 쓰는 와중인 지금은 이어폰으로 음악까지 듣고 있으니 '음악을 들으며 무언가에 열중하는 사람'에게는 접근하기가 더 어려울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부탁을 받던 때 필자는 2인용 테이블에 앉아 한창을 '조의 영역'을 보던 중이었고 안타깝게도(?) 그 여성의 타깃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분에게 뭐라 하는 마음은 아닙니다. 그냥 '왜 카페에 오자마자 글을 쓰지 못했을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작은 자책을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2. '글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생명연장의 꿈


일을 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저에게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뭐랄까 '일을 하는 나'에서 '글을 쓰는 나'로 다시 돌아오는 조금은 막연한 시간의 경과가 필요하다고나 할까요. 특히나 오늘 같이 퇴근 후에 글을 쓰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근 후에 글을 쓰려면 일을 더 정력적으로 해야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일을 마처야 '글 쓰는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기 때문이지요. 허나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정력을 쏟아서 일에 몰두하면 '글 쓰는 나'로서의 정체성을 도리어 잃어버리는 느낌도 듭니다. 사람이 내뿜을 수 있는 에너지에는 아마 한계 있겠지요. '일하는 나'와 '글 쓰는 나' 중 어느 자아에 더 많은 에너지를 할애할 것인가 하는 씁쓸한 선택의 기로에서 선택은 아무래도 '일하는 나'로 치우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서도 그것이 필자의 생업이고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간이고 또 주간(낮)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글 쓰는 나'의 정체성을 생생히 유지하기 위해 부도덕하게 일에 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 연유로 글을 쓰러 카페에 들어와도 다시 글 쓰는 내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꽤 불쾌한 시간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글감의 문제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괜찮은 글감이 있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과 결부되는 조금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떠오르는 글감이 없다는 것은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 안쓰러운 (?) 순간을 방지하기 위한 보험으로 평소에 쓰고 싶은 글감에 대한 메모를 하지만 메모를 보고도 그게 어떤 메시지였는가가 스스로도 잘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메모가 함의하고 있는 맥락 있는 스토리는 잊어버리고 어떤 표상만 머릿속에 남아있어 글감으로서의 생명력이 이미 소진된 것입니다. 잡은 물고기가 뙤약볕에 이미 부패해 버렸다고나 할까요. 그럴 땐 다시 낚싯대를 들고 신선한 물고기를 다시 낚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퇴근을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흙속에 파묻힌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끄집어내는 일인 것 같습니다. 일을 하는 동안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은 풍파에 흙으로 덮입니다. 그리고 다시 '글 쓰는 나'로서 돌아가기 위해서는 덮인 흙을 파내야 합니다. 그 흙을 파내는 막막한 시간, 아직 '글 쓰는 나'로서의 정체성에 숨이 붙어있을지, 아니면 이미 숨을 거뒀을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단은 흙을 파내고 봐야 하는 그 시간은 조금은 막연하고 막막한 시간입니다. 그 순간에 내가 의미 있게 쓸 수 있는 글감을 발견하지 못하면 '글 쓰는 사람' 으로서의 스스로의 필요감에 큰 타격을 얻는 것이고 반대로 그나마라도 제법 의미 있다 생각하는 주제를 찾으면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생명연장'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생명연장은 일단 찾은 그 주제의 글을 쓸 때까지만입니다. 다음에 글 쓰는 날에는 또 다른 흙 파내기 절차를 밟으며 생명연장의 꿈을 꿔야만 합니다. 생사의 기로가 찰나이듯 '글 쓰는 나'의 정체성이 여전히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도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을 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 '글 쓰는나'와 '일하는 나'라는 양단의 정체성을 왔다 갔다 하는 박쥐 같은 일입니다. 가끔은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이중인격자가 되는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그렇지만 그 두 가지의 인격을 함께 가져가지 못하면 '글 쓰는 나'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글 쓰는 일이 나의 생업이었다면 그렇게 두 개의 인격을 왔다 갔다 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기에 글 쓰는 행위가 나를 먹고 살릴 수 없다면, 혹은 적어도 그런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일하는 나'는 '글 쓰는 나'를 위협하는 동시에 먹여 살리기도 하는 모순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면에서 '글 쓰는 나'에게 있어 '일하는 나'는 애증과 같은 존재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3. 왜 그렇게 쓰려고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문제는 왜 그렇게 고달픈 글쓰기라는 일을 자꾸 하려는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자꾸 그렇게 써재끼려고 하는 것인가. 생각해보면 필자는 형식이 어떻든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서 존재의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써의 여러 형식 중 글쓰기는 현재로서는 필자에게 남은, 혹은 필자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형식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괜찮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대 보람이 있고 또 글이 고르게 써질 때에 느껴지는 묘한 카타르시스도 있습니다. 그 두 가지의 쾌감을 다시 느끼기 위해 그렇게 하루하루 생명연장을 해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천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다른 어떤 형식 중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표현 수단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른 형식의 메시지 송출과 달리 글을 쓰는 순간 자체에는 거의 온전히 나 자신과만 만나면 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1세대 힙합 뮤지션 원썬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쇼미 더 머니로 화제가 된 이후로 어떤 근황으로 살고 있는지를 취재한 내용이었습니다. 쇼미 더 머니에서 원선은 꼰대가 된 구시대 래퍼로 그려졌지만 인터뷰에서의 그의 진짜 모습은 그런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중 힙합 뮤지션으로서의 힘겨움과 보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이 조금 멋있었습니다.


힙합을 하고 소리를 내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너는 똥통에 들어간 거다.


랩을 하기로 맘먹은 순간 똥통에 들어간 것이다. 그 안에서 계속 똥을 푸다 보면 어느 순간 숨이라도 쉬어지는 순간이 오고 어느 순간 몸뚱이가 드러나고 그러면 대중들이 알아보지만 그것도 순간이다. 열심히 열심히 퍼내도 대중들이 그런 뮤지션이 있었다 정도 기억할 뿐이다. 하지만 자기 목소리나 메시지가 있다면 세상이 알아봐 주지 않더라 그건 멋있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계속 그 똥물을 퍼내야 한다.


랩을 하는 순간 똥통에 들어간 것이다. 9분 12초부터


글 한편 쓴다고 딱히 누가 알아주지는 않는 상황 속에서 어쩌면 필자도 똥통에 들어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원선의 말처럼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는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의 글을 마칩니다. 글을 쓰는 동안 스타벅스가 마감돼 지금은 인근 할리스에 있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열두 시가 훨씬 넘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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