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욕을 완전히 잃은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식욕의 종말을 맞이할 때의 인간의 존엄함은 무엇일까.

by 글객

나이 90이 넘은 외할아버지는 현재 요양원에 계신다. 몇 년 전부터 건강이 안 좋아지기 시작하셨고 작년에는 전립선암까지 생기셨다. 다행히 통증은 못 느끼셔서 이래저래 생활은 해오셨는데 지금은 치매까지 겹쳐서 거의 혼자서 생활을 못하신다. 엄마는 몇 달 전 요양원을 알아봤고 그렇게 할아버지는 용인에 있는 한 요양원에 들어가셨다. 엄마의 말로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그 충격으로 인해 심신이 점점 쇄약 해지셨다고 했다.


아파지기 시작한 시점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근래에 종종 본 할아버지는 식사를 잘하지 못하셨다. 드시는 음식의 종류가 제한적이었고 그마저도 입으로 가져가는 양이 적었다. 삼계탕 같은 음식을 앞에 두고도 한사코 드시기를 거부하셨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식사 중에 몇 번 씩이나 밥 좀 더 드시라고 이야기를 하곤 했다. 워낙에 고집이 센 할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완강히 거부하고는 했는데 그렇게 실랑이 아닌 실랑이가 몇 차례 진행되고 나서야 할아버지의 식사량이 결정됐었다. 그건 할아버지가 원하는 것보다 조금 더, 그리고 엄마가 원하는 것보다 조금 못한 양이었다.


며칠 전에는 엄마의 요청으로 집에서 조금 떨어진 병원에서 진료를 보신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셔드려야 했다. 진료 후에 약국에 들른 엄마와 할아버지를 차에 태웠을 때 본 할아버지는 피부가 유난히 하얬고 딱 봐도 기력이 전혀 없었다. 인사말 대신 뱉은 "차에 타세요"라는 말에는 할아버지 대신 엄마의 대답이 돌아왔다. 엄마는 이제 할아버지가 말을 거의 못 알아듣는다고 하셨다.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을 넘어서 할아버지는 옆에 있는 딸이 누군지도 알아보지를 못했다.


곧장 요양원으로 갈 줄 알았던 나는 내비게이션을 미리 요양원의 주소로 찍어두었지만 시간이 점심시간 때였던 터라 엄마는 식사를 하고 가자고 했다. 일단은 집 근처로 가자는 엄마의 말에 나는 차를 몰았고 집 바로 옆에 위치한 한 백반집에 들어갔다. 못 보던 집이었는데 엄마의 말로는 맛이 썩 괜찮다고 했다. 엄마와 나는 동태찌개를 시켰고 할아버지는 순두부찌개를 시켜드렸다. 할아버지는 순두부찌개를 좋아하신다고 하셨다.


동태찌개는 맛있었다. 엄청 맛있다기보다는 국물이 개운했다. 허나 할아버지는 역시나 밥을 거의 잡수지 않았다. 좋아하시는 순두부찌개를 앞에 두고도 음식 드시기를 거의 거부하셨다. 그것은 뭐랄까 음식이 더 이상 음식으로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는 이제 식욕이라는 것이 거의 사라진 것일까. 눈 앞의 음식이 어떻게 느껴지면 저렇게 거북한 표정이 나오는 걸까.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과 달리 엄마는 여전히 할아버지에게 식사를 권했다. 아부지 순두부예요. 아부지 계란 드세요. 그렇게 몇 번이고 밥 좀 드시라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할아버지는 겨우 국물에 말아 밥 몇 숟갈을 드실 뿐이었다.


식욕이 사라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눈 앞의 음식이 쓰레기처럼 느껴지는 기분일까. 내가 할아버지처럼 나이가 들고 식욕이라는 것을 완전히 잃어버린다면 재차 음식을 권하는 자식이 고맙게 느껴질까 밉게 느껴질까. 그렇게 생각하면 기력이 없어 뭐라도 드셔야지 하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음식을 권하는 엄마의 효심이 한 편으로는 불편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것이 옳지 않은 행동이라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다만 한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생각이다. 자유의지를 갖는 인간이 식욕의 결핍을 마주했을 때 어떤 선택이 그 자유의지를 충족시키는 선택이 될까. 눈 앞의 음식을 먹지 않으면 나 자신의 생명력을 유지시킬 수 없다. 하지만 그 음식을 씹고 삼키는 것 자체가 고역이 돼버리는 모순의 순간을 맞이할 때 하나의 인간으로서 나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음식을 먹는 일일까. 먹기를 거부하는 일일까. 치매로 딸을 못 알아볼지언정, 기력이 쇄 해 한 걸음 딛는 것조차 어려울지언정 할아버지는 그런 인간으로서의 본능적인 고뇌를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어떤 나의 건방진 생각의 투영이었다.


유구한 인류 역사의 시작은 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식욕을 느낀다는 것은 곧 생명력이 고갈되고 있다는 뜻이었고 인류는 수렵채집 생활로 삶을 연명했다. 수렵생활에서 정착생활로 삶의 양식이 전환되며 인류는 음식을 저장할 수 있게 됐고 저장된 음식은 안정된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했고 모든 사람이 식량 확보 활동을 하지 않아도 됨으로써 직업이 생겼다. 식량으로 시작된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해 군인이 등장했고 남은 식량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를 고뇌하며 정치라는 개념이 발생했다. 전 세계적으로 역사적인 민란과 폭동이 있었던 시기는 기후변화가 만들어낸 기근의 시기와 겹쳤다. 문명이란 안정적인 식욕의 해결 이후에 등장한 인간의 삶의 양식이고 동물과의 차별을 만들어내는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지적 활동은 '식욕의 해결'이라는, '생명과 직결되는 걱정'과 연관되었다.


수천 년 동아 지구의 기후는 예상 이상으로 역동적으로 변동했다. 기후가 좋지 못해 수확이 충분하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군주라도 민란이 일어난다. 요컨대 인민이 배불리 먹으면 정치가 다소 이상하더라도 세상은 평화롭고, 먹지 못하면 세상은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중략) 태양이 흐려지고, 식량이 부족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일은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는 토대가 되었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상이나 종교는 한랭화의 시기에 발생한 것이 많다.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고, 죽음과 마주하는 것은 인간을 깊은 사색에 빠지게 하는 것일까? - 탄소 문명 中 -


식욕을 해결하기 위한 투쟁이었던 인류의 역사와는 다르게 할아버지는 지금 그 투쟁의 대상 자체를 잃고 있다. 그 대상을 잃는다는 것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소임을 다했음을 의미할까 아니면 하나의 생명의 안쓰러운 퇴장을 의미할까. 투쟁의 대상을 잃은 할아버지의 인간으로서의 고뇌는 지금 무엇일까. '인간은 평생 배워야 혀'라고 입이 닳도록 말씀하시던 그와의 이별을 이제 준비할 시간이 온 것 같다.


이미지 출처 : https://pixabay.com/ko/photos/%EC%9D%BC%EB%AA%B0-%EB%82%98%EB%AC%B4-%EC%8B%A4%EB%A3%A8%EC%97%A3-%ED%99%A9%ED%98%BC-3156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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