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만끽

[ 제주는 언제나 나를 품는다_episode_27]

by 글객
7/31(금) - DAY 5_1


#67

여전히 활성화되어있는 평소의 알람으로 인해서였는지, 아니면 7시도 되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서는 옆방 식구들의 말소리와 문 여는 소리 때문이었는지 비교적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비염 환자의 아침은 자주 불쾌하다. 코는 막혀있고 목구멍은 건조하고 텁텁하다. 눈을 떴어도 몽롱한 정신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도 오늘은 꽤 괜찮은 편이다. 아주 잠시간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니 빨래 생각이 났다. 얼굴을 대강 씻고 모아두었던 빨래 봉지에서 하얀색 면 티셔츠 두 장과 가로 줄무늬 티셔츠를 꺼냈다. 갈색 조거 팬츠와 조금 두툼한 베이지색 쿨링 셔츠는 꺼내지 않고 그냥 두었다. 그렇게 세면대에 티셔츠 세 벌을 쏟아놓은 후에 잠깐을 고민하다가 가로 줄무늬 티셔츠는 다시 밖으로 꺼냈다. 버겁지 않은 마음으로 손빨래를 하기에는 흰 면티 두 장이 한계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수도를 틀어 티셔츠 두 장을 적시고 비누칠을 하려는데 애초에도 지우개 만하던 흰색 비누가 반은 더 작아져 있었다. 어제 샤워를 할 때 속옷 빨래를 했기 때문이다. 비벼도 거품이 잘 나지 않아 샤워 부스에 있던 샴푸를 가져다 놓고는 쭈욱 쭈욱 하고 조금씩 뿌려가며 빨래를 벅벅 비벼 빨기 시작했다. 샴푸를 조금 뿌려 비비고 거품이 잘 나는 것 같지 않아 물을 조금 더 뿌리고, 비비고, 뿌리고, 비비고, 양을 조금씩 조절해가며 뿌리고 적시고 비비고를 반복하는 것이 마치 요리를 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데친 시금치에 간장과 다진 마늘을 넣고 참기름을 곁들어 무쳐내듯이 티셔츠 두 장을 곱게 빨았다. 다 빤 티셔츠 두 장은 면이 너무 늘어지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짜 준 후에 '팡'소리가 나게 한 장씩 턴 후 옷장에 있던 옷걸이 두 개를 꺼내 각각 걸었다. 셔츠가 걸린 옷걸이는 수직으로 연결시켜 창틀 상부에 달려 있는 쇠막대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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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를 하니 배가 고파졌다. 전날 잠깐 다녀온 편의점에서 산 즉석밥 하나와 3분 카레를 꺼냈다. 싱크대 밑 수납장에서 작은 사이즈 냄비 하나를 꺼내 물을 담아 끓이고 즉석밥 하나는 비닐을 벗겨 복도에 있는 전자레인지에 2분을 돌렸다. 물이 끓어 오른 뒤에는 카레가 들어있는 팩을 냄비에 그대로 집어넣었다. 물을 조금 적게 잡아서 팩이 물에 완전히 잠기지 않아 젓가락을 하나 꺼내 바닥까지 닿도록 꾹꾹 눌러주었다. 수납장에는 사이즈가 더 큰 냄비가 하나 더 있었는데 거기에는 물을 가득 담아 투숙자용으로 준비되어있는 현미녹차 하나를 꺼내서 끓였다. 오늘의 일정을 다 마치고 돌아오면 적당히 식어 갈증을 해소할 음료가 되어 줄 것이다.


조리를 다 마치고 나서는 넓은 접시에 즉석밥을 엎어 담고 그 위에 뜨거워진 카레를 천천히 부었다. 동그란 모양의 밥이 절반은 흰색으로 남을 수 있도록 접시의 1/2 정도만 카레를 부었다. 왜 그 노래가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조리 전 유튜브로 럼블피쉬예감좋은날을 틀어두었었는데 요리를 하는 사이 '프라이머리의 띵곡 모음'이라는 재생목록으로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그렇게 틀어진 노래를 들으며 접시 위의 카레를 조금씩 비벼 먹었다. 분말로 직접 만드는 카레와는 다른 특유의 향이 좋았지만 부족한 건더기는 식감을 아쉽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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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다 마친 후에는 어제 글을 쓰며 물과 커피를 마셨던 컵을 포함해 쌓인 그릇들을 설거지했다. 식기 건조대가 따로 없어 머리 위에 있는 기다란 수납장에 수건 한 장을 완전히 펴서 깔아 둔 뒤 헹굼을 마친 식기들을 그곳에 하나씩 올려두었다. 좁은 싱크대 덕에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튀어서 설거지를 다 마친 후에는 티슈를 몇 장 뽑아 그 물기들을 닦았다. 그래도 남아있는 부분은 또 다른 수건으로 마저 닦아내어 완전히 깔끔하게 만들어두었다.


여행은 허락된 시간을 쏟아붓듯이 하여 모든 것을 체험하고 오는 것에만 의미가 있지는 않다. 내가 만들어내는 소리 외에는 창밖의 새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공간 속에서 나의 행동에 온전하게 몰두 해갈 때 차분해지는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것도 여행에서 얻는 또 하나의 치유다. 그런 시간들은 잃어버렸거나 잊어버린 순수한 나 자신을 다시 찾게 만든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이 시간이 나를 안온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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