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오해영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던가. 내용은 잘 모르지만 후크송처럼 제목이 귀에 탁 걸리는 듯한 이름이다. 그 제목을 형식만 가져와 내 제주여행으로 환원시키면 그것은 또202다. 이번 여행에서만 202번 버스를 몇 번이나 탔는지 모르겠다. 예약해둔 스쿠터를 대여하기 위해, 또 제주 서쪽에서의 여행을 매조지하고 동쪽 반구로 향하기 위해 202번 버스를 '또' 기다리고 있었다.
#53
20대 중반 즈음에 스쿠터를 타고 제주도를 일주한 적이 있다. 재수학원 같은반 친구들과 함께한 4박5일 짜리 여행이었는데 스쿠터를 타는 내내 비가 왔었다. 빗줄기가 꽤 굵어서 우의를 두개씩 입은 채 며칠을 스쿠터를 몰았었는데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게 몹시도 아팠던 기억이 있다. 어처구니 없는 사실은 일주를 마치고 스쿠터를 반납하니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쨍쨍한 햇볕이 우리를 맞이했다는 사실이었다. 참 기구한 팔자의 여행이었다.
비를 뚫고 달려야 했던 그 당시의 아쉬움을 만회하려는 듯, 근 7~8년 만에 다시 스쿠터를 탈 생각을 하니 설레는 감정이 들었다. 게다가 이미 확인한 일기예보 상으로는 스쿠터를 빌린 3일 동안 비소식도 없었고 이전 며칠보다 화창한 날씨가 예상되고 있었다. 버스의 운행 경로상에서 공항을 조금 지나면 나오는 정류장에 내려 5분정도를 걸어가니 예약한 스쿠터대여점이 보였다. 삼각지붕의 대여점 안에는 몇 십대의 스쿠터가 가지런히 주차되어 있었고 예약자들을 기다리는지 몇몇 스쿠터는 아예 중앙 쪽으로 나와있었다.
안쪽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데스크 쪽으로가서 무거운 가방과 손에든 짐을 내려 놓으니 직원이 이름을 확인하고는 서명해야 할 서류를 건내주었다. 직원은 먼저 와 앉아있는 한 여성에게도 따로 서류를 전해주었고 조금 뒤에 추가로 입장한 몇명의 사람들에게도 또 서류를 전해주었다. 그들 또한 대부분 여성들이었다.
직원은 나를 포함, 서류를 받아든 모든 사람들에게 1번부터 16번까지 모든 질문에 '예'라고 표시해주기를 요청했다. 복잡한 문구를 제시하면서도 읽어 볼 여유는 별로 허락하지 않는 세상의 작동 속도는 별로 달갑지가 못하다. 기계적으로 '예스'를 토해낸 듯한 서류들이 모두 데스크에 제출된 이후에는 서명한 서류를 보며 직원의 안내사항과 주의점 등을 설명들었다. 익숙한 톤과 안정된 리듬감으로 쉼표도 없이 말을 잇는 직원의 모습은 흡사 속사포 약관 플로우를 내뱉는 보험상담사의 기습적인 안내전화와도 같았다.
" 네 분 중 GLO(실제로는 본명을 말했다.)님만 일반자차 보험 신청하셨고 나머지 세 분은 완전자차 하셨습니다. 완전 자차는 한도액이 없고 본인부담도 없으시고, 일반자차는 한도액 50만원 안에서 본인부담 5만원이 있습니다. 한도액 이상의 사고에 대해서는 본인이 직접 부담하셔야 합니다. "
#54
뭔가 탈 것을 렌트할 때에는 내적 갈등의 순간을 맞이한다. 결정에 따라 추가되는 금액이 달라지는 보험선택의 순간이다. 내가 맞이했던 선택지는 보험 미가입, 일반자차, 완전자차의 세 가지였다. 자동차렌트의 경우 미가입은 없겠지만 마찬가지로 몇 단계로 나뉘어져 있어 높은 등급은 보험료를 많이 내는 대신 보장액이 크고 낮은 등급은 보험료를 적게 내는 대신 보장금액이 그만큼 적다. 말 그대로 '보험'이니 보장액이 높은 게 장땡이겠지만 모든 건 비용의 문제다.
보험을 구매하고 얻는 건 무엇일까. 실상 그런 선택지를 두고 고민을 하는 이유는 항상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이 축적될수록 이것 참 헛돈을 쓰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고는 한다. 뭐 물론 그리 어른스러운 생각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여하간 보험이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돈 아까울 일이고, 그렇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의 무엇이다. 보험사기단이 아니고서야 보험료가 아깝다는 이유로 자해공갈단 마냥 자발적으로 사고를 일으킬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보험이란 안도감을 사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다. 유형의 가치를 갈망하면 돌아오는 것은 허망함이다. 내가 보험을 구매하지 않았을 때 느껴야 하는 불안함을 삭제하는 비용이 보험이다. 보험상담사의 예상치 못한 상담전화가 불쾌한 이유도 이 보험이라는 것이 그런 인간의 취약한 감정을 터전으로 하여 수익구조를 만들고 자본을 축적하기 때문이다. 하기는 싫고 안 할 수는 없는, 그것이 보험의 본질이다.
보험사의 배를 채우고 싶지는 않으며 동시에 내 불안감도 최소한으로는 해소할 수 있는 선택의 선이 일반자차라는 중간지대였다. 하지만 4명의 완전자차 선택자들 사이에 껴서 굳이 내 일반자차 보험의 보장 한도와 약한 효력을 꼬집어 설명듣는 상황을 예상치는 못했다. 감정의 취약함을 해소하고자 했던 일이 되려 취약함을 확인하는 꼴이 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