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쿠터 1

[ 제주는 언제나 나를 품는다_episode_22 ]

by 글객
7/30(목) - DAY 4_7


#55


" 한라산 부근을 지나는 1139번 도로의 이 구간은 운행하시면 안 됩니다. "


계약 서류를 랩(Rap)처럼 읊어준 여직원은 이내 지도를 펼쳐 보이며 스쿠터로 운행하면 안 되는 구간을 짚어주었다. 이후에는 바로 옆 선반장에서 마음에 드는 헬멧을 하나씩 고르기를 요청하였다. 벽 한쪽을 위아래로 꽉 차게 차지하고 있던 선반장에 놓인 여러 개의 헬멧 중, 마음에 드는 놈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세월의 풍파를 많이 맞은 듯, 대체로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많았고 파스텔톤의 색깔은 꽤나 퇴색돼 있었다. 디자인은 모두 거기서 거기 같은 뻔한 느낌이 들었다.


" 헬멧을 다 고르셨으면 중앙 쪽에서 조작법 설명을 들으시면 됩니다. "


가게로 들어올 때 보았던, 이미 중앙 쪽으로 나와있던 스쿠터 4대는 나를 포함해 함께 안내를 받은 여성 3인이 예약한 스쿠터를 미리 꺼내 놓은 것이었다. 데스크 여성 직원의 바통을 이어받은 호리호리한 체격의 젊은 남자 직원은 예약자들에게 각자 대여한 스쿠터 앞에 서기를 요구한 뒤 공통적인 조작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공통의 설명이 끝난 뒤에는 각 스쿠터에 맞는 개별 조작법을 과외하듯이 설명해주었다. 가입한 보험의 수준과는 정반대로 선택한 스쿠터의 배기량은 내가 선택한 모델이 제일 상급이었다. 125cc의 스쿠터를 선택한 나와는 다르게 여성 3인이 선택한 스쿠터는 전부 50cc 모델로 모두 똑같은 브랜드의 스쿠터였다.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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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님 모델은 조작 방식이 50cc 모델과 달라서 다시 알려드릴게요. 우선... "


호리호리한 사내는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내 125cc 스쿠터의 조작법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좌회전 및 우회전 스위치, 그리고 그 상태를 해지하는 방법. 키를 꼽고 주유구를 여는 요령과 시트를 여는 법. 그리고 그것을 열었을 때 보이는 짐을 넣을 수 있는 공간까지. 남자가 설명을 이어갈수록 스쿠터의 이모저모가 머릿속에 인식되었다. 대여한 장비에 불과하지만 그 과정을 거치면서 125cc의 스쿠터는 조금씩 나의 것이 되어갔다. 그리고 그 소유감은, 설명을 마친 남자가 스쿠터를 가게 밖 도로가로 끌고 나간 뒤 시승을 권한 순간부터 증폭되기 시작했다.


" 저쪽 길 끝 쪽에 버스 주차되어 있는 것 보이시나요? 그쪽까지 두세 번 왔다 갔다 하면서 시범운행 한 번 해보세요. 익숙해질 때까지 몰아보시면 됩니다. "


최종의 것처럼 느껴지는 멘트를 던진 사내를 뒤로 하고 나는 스쿠터에 올랐다. 양쪽 핸들을 굳게 잡은 채 스쿠터를 앞쪽으로 힘차게 밀어내니 고정되었던 메인스탠드(스쿠터를 살짝 기울여 세우는 사이드 스탠드와 달리 균형을 유지한 채 스쿠터 몸통 전체를 살짝 뜨게 만들어 바닥에 세우는 장치)가 자연스럽게 젖혀지면서 주행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125cc의 스쿠터는 생각보다 무거워서 꽉 붙잡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은 묵직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다년간의 자전거 운행으로 다져진 이륜차에 대한 특별한 균형감각은 나를 금방이나 스쿠터에 적응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남자의 말대로 버스가 세워져 있는 지점까지 도로를 두세 번 왕복하니 무게감이나 엑셀 감이 대부분 익숙해졌다. 하지만 주행을 마친 뒤 메인스탠드를 이용하여 스쿠터를 세우는 것은 조금 더 적응이 필요한 듯 느껴졌다. 남자 직원은 스쿠터가 쓰러질 수 있으니 사이드 스탠드는 이용하지 말고 항상 메인스탠드로 스쿠터를 세워두라고 안내했었다.



" 이제 출발해도 되나요? "


" 끝으로 스마트폰 거치대 사용법 알려드릴게요. 거치대 힘으로만 스마트폰을 고정하면 주행 중에 떨어질 수 있으니 고정한 뒤에는 고무줄로 이렇게 두세 번 감아주세요"


사내는 입으로 설명을 하면서 내 스마트폰을 고정시켜 주었다. 검은색의 두꺼운 고무줄 표면은 일반적인 노란색 고무줄과 달리 직물로 되어있었다. 그 두꺼운 줄이 거치대와 스마트폰을 이리저리 휘감은 모습은 뭔가가 거추장스럽게 보여 깔끔하지 못했다. 휘감긴 검은색 고무줄이 스마트폰 화면을 위아래로 가리고 있어 그 부분을 터치하기가 불편해진 점은 안전을 위해 덤으로 얻은 한 가지의 불편함이었다.



#57


손에 들고 있던 봉투 속 짐들은 시트 아래쪽 공간에 넣을 수 있었지만 배낭은 그대로 등에 매야만 했다. 쓰고 있던 카우보이 모자는 헬멧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기 때문에 목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등 뒤로 젖혀져야 했다. 배낭에는 이미 스냅백이 엎어진 형태로 매달려있었기 때문에 뒤에서 보자면 모자류만 3가지를 거닐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차림새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배낭 안에 모자를 쑤셔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방도가 없었다.


고무줄이 화면을 가로지르고 있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켜서 내비게이션 앱을 실행했다. 예약해둔 두 번째 숙소의 주소를 입력하니 어플은 최적의 길은 알려주었다. 일단은 도심을 가로질러야 큰 도로를 탈 수 있었고 기 이후부터는 계속해서 오르막을 올라야 했다. 숙소가 제주 동쪽 조천읍의 내륙 쪽이었기 때문에 한라산이 중앙에 위치한 제주라는 섬에서 점점 고지대로 향하는 것은 당연지사의 일이었다.


어찌 됐건 기대하던 스쿠터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살짝 외진 곳이었던 대여점 부근을 빠져나오니 규모 있는 도로가 이어졌다. 그럴수록 더 많은 차량들이 각자의 갈 길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흐름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스쿠터의 스로틀 그립을 뒤로 재낄수록 엔진은 더 큰 굉음을 냈고 스쿠터의 속도는 더욱더 빨라져 갔다. 그리고 그 속도에 비례하는 바람의 세기가 온몸을 감쌌다. 예상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바람의 세기가 강해질수록 스쿠터를 타고 도로를 달리는 기분은 조금씩 불쾌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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