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뒤의 완벽한 실행보다 어설픈 상태여도 지금 실행하는 게 훨씬 더 가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왜일까. 아마도 그것은 완벽한 상태라는 게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완벽한 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데 완벽한 상태를 기다려서 무엇인가를 시도한다는 것은 결국 무한대로 무언인가를 유보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부족한 상태로도 무엇인가를 해야 흔적이 남고, 흔적이 남아야 평가의 대상이 되며, 평가를 해야 보완점이 보이게 된다. 일주일 앞서 부족한 상태로 무엇인가를 하라는 것은 그 일주일 동안 그것을 보완한 상태가 애초에 완벽하다고 판단한 그 상태보다 훨씬 훌륭하기 때문일 것이다.
'천천히 서둘러라'라는 말도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말에서는 무엇인가를 '앞서'하는 것과 '속도를 빠르게' 하는 것을 두고 모두 '빨리'라고 표현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말은 early와 slow라는 말을 정확히 나눠서 표현하고 있다. 일찍 시작하되 급하게 대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서두르는 것과 천천히 하는 것은 하나의 세트와 같다. 서두르면 여유가 생기기 마련이고 반대로 늦으면 급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급해지면 대상을 온전히 대할 수 없게 되고 변수를 만들어 실책을 만나게 한다. 그러니 이러나저러나 무엇인가를 이르게 시작하는 것에 미덕이 있음이 '천천히 서둘러라'라는 말에 깃들어 있는 것 같다.
가까운 미래에 완벽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미완의 상태를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시도를 자주 할 수 있고 시도가 잦아야 이루고자 하는 그 무엇에 군더더기가 조금씩 사라진다. 좋은 결정이란 없고 그냥 결정만이 존재하듯이 완벽한 실행이란 없고 실행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실행을 많이 하는 것 자체가 더 나아지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실행에 있어서는 질은 존재하지 않고 그 실행의 유무만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