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외장하드.

by 글객

나이가 조금씩 들수록 활자에 대한 흡수력이 떨어짐을 느낀다. 단숨에 흡착되는 느낌이 덜하고 집중하지 않으면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연결이 눈을 깜빡일 때 세상이 잠시 없어지는 것처럼 단절된다. 때로는 소리내어 문장을 읽어 인식에서 끊기는 정보의 연결을 소리로써 연결하기도 하고 활자와 눈사이의 물리적인 거리를 이리저리 조절해보며 한눈에 들어오는 글자의 수가 얼만큼일 때가 적절한지를 찾아보기도 한다. 너무 많은 것을 알게되어 새롭게 느껴지는 정보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더 이상 정보가 들어갈 공간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아서 일까. 하루의 일을 모두 마친 후 활자를 탐하는 것은 복싱 글러브를 끼고 가려운 곳을 긁는 것만큼이나 시원한 맛이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드문드문 찾아오는 신선함이라 귀중히 느껴지기도 한다.


컴퓨터의 하드디스크 용량을 다 써버리면 외장하드를 사용한다. 그것은 필요에 따라 활용에 따라 컴퓨터와 한 몸이 되기도 또 전혀 별개의 존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유에스비 케이블이란 접속의 매개체를 통해 하나의 개체가 되었을 때는 외장하드는 컴퓨터의 일부가 된다. CPU로 하여금 탐색될 의무가 부여된다. 종속의 개념이다.


어쩌면 그런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떤 의도로 살던 간에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하드디스크를 조금씩 사용하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데이터가 지워진 것이 아니라 적절한 정리와 분류가 없었던 탓에 경로를 잊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미 기록된 정보와 기억은 그 양이 방대할수록 재정리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더 활자를 탐닉할 필요가 있다. 더 이상 머릿속에 무엇을 꾸역꾸역 넣기가 어렵다면 어떤 곳에 어떤 유용한 정보가 있는지까지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따지면 책은 외장하드다. CPU만 제몫을 하는 오래된 두뇌에 활용할 정보를 제공해주는 보조기억장치다.


이미지 : http://www.online-tech-tips.com/computer-tips/external-hard-drive-not-recogniz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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