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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 May 02. 2021

알파벳 수프, 드셔 보셨나요?

내 이름 뒤를 따라오는 바로 그것


명함을 주고받을 때 보면 이름 뒤에 흔히 따라붙는 알파벳 글자들이 있다.

"김ㅇㅇ, MS., Ph.D., CEO"

"최ㅇㅇ, JD, NACUA, NASPA"  


의사를 하면 MD, 치대를 가면 DDS, 변호사를 하면 JD, 박사를 하면 PhD, 대표를 하면 CEO, 회사에 들어가면 VP, CPA, 교육학을 하면 EDD, 그 외에도 NACUA, NASPA, MEd, MS, MArch.. 읽기만 해도 숨차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이름 뒤에 뜻도 모를 알파벳이 줄줄이 달린 것이 왠지 좀 민망한지, "제 이름 뒤에 뒤죽박죽 알파벳 수프가 있어요"라고 농담 삼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은 그 몇 개의 글자를 위해 한평생을 달려 나갔을 테다. 나도 그 알파벳 수프를 위해 안 본시험이 없을 정도로 달음박질을 했다. 나 자신을 먼저 이해하고 탐색하기보다는 밖으로 보암직한 것들을 위해 질주했던 시간들 말이다.  


오늘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주제는 목적 있는 방황에 대한 고찰과 그 경험이 주는 가치에 대한 것이다. 교육이라는 사다리를 통해 더 큰 세계로 자녀들을 쏘아 올리고 싶으신 부모님들, 혹은 정체성 없는 커리어의 선상 위에 계신 분들께 질문을 던져보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와 아이들은 매년 여름마다 한국을 나간다.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친척들을 만나 살갗을 부비며 사랑을 듬뿍 받는 유일한 시간을 아이들은 일 년 내내 기다린다. 특히 우리 아이들은 문방구와 편의점을 가기 위해 한국을 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딜 둘러봐도 나무밖에 없는 숲 속에 사는 꼬마들에겐, 아파트 상가에서 사 먹는 떡볶이, 만물상 같은 편의점, 눈이 휘둥그레지는 학교 앞 문방구는 그야말로 별천지다.  


엄마인 나에게 한국은 학원가 별천지 이기도 하다. '요즘 한국애들은 영어유치원부터 시작해서, 외국 한번 안 나가도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한다더라', '코딩은 기본이고, 수학은 벌써 정석을 푼다더라', '전 세계에서 학원은 한국이 짱이잖아'라는 이야기들에 귀가 팔랑 인다. 작년 여름에는 '그래 어디, 이왕 한국에 왔으니 학원이나 좀 보내볼까' 싶어서 처음으로 학원 탐방을 좀 했더랬다. 아이비리그 플래그가 즐비하게 걸린 벽에는 "SAT, ACT, AP, IB, GPA 각종 시험 만점 및 고득점자 최다 배출!", "상위 1% 글로버 리더를 위한 명품 교육 시스템", "미국 명문대 출신 및 스타 강사진"이라고 적혀 있었다. 여름특강이라는 시간표만 봐도, 일주일 내내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초등학생이 무슨 공부를 저렇게 많이 하는지, '우리 애는 큰일 났는데?' 싶은 스케줄이었다. 저렇게 내달려서 가고 싶은 곳이 결국은 어디일까? 무엇을 목표로 하고 저렇듯 경주마처럼 질주하는 걸까? 방황이란 단 한 방울도 틈탈 수 없는 촘촘한 스케줄 안에서, 하자니 미치겠고 안 하자니 불안한 시스템 안에서 다들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



Now what?

나 역시 오직 대학이라는 목표만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던 경주마였다. 우리 부모님은 대치동 학원가의 부모님들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아이들 학업을 중심으로 하루가 돌아가는 부모님은 아니셨지만, 오히려 이민자 가정의 자녀로서 그 희생에 보답해드려야 한다는 어깨는 더 무거웠다. 그 보답의 끝판왕은 바로 "아이비리그 입성"이었다. 대학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 집은 성공했다." "부모가 고생한 보람이 있네"라는 소리를 듣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https://brunch.co.kr/@glolee/26

지금 되돌아보면 미국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열정과 야망녀로 학교에서 종횡무진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집에 오면 약간의 우울증도 있지 않았었나 싶다. 모든 것을 완벽히 해내야 된다는 스스로의 압박 속에서 학교생활을 하다가, 하교 후 집에 오면 3-4시간 내리 죽은 사람처럼 잠을 잤다.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고, 아무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고, 그냥 블랙아웃이 되고 싶었다. 낮잠이라고 하기엔 꽤 긴 시간의 수면을 취했다. 늘 그렇게 집에 오면 배터리가 소진된 기분으로 잠을 자고, 저녁 시간이 되면 일어나 다시 전투적으로 공부하는 삶을 살다 보니, 빨리 원하는 대학을 가서 이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게 목표였다. 나는 누군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고민해볼 여유 따윈 없었다.  


"방황과 시도"라는 특권

사실 여러 방황과 시도를 해보기에 브라운 대학보다 더 적합한 곳은 없었다. 아이비리그 대학들 중 브라운 대학이 특별한 이유들 중 하나는 "Open Curriculum"이라는 제도 때문이다. 일반 대학들은 Core Curriculum이라고 해서 학부생들이 꼭 들어야 하는 필수 과목들을 정해놓고 그것들을 이수해야 졸업을 할 수 있는데, 브라운 대학의 경우에는 "The Architect of Your Own Education"이라는 철학 아래, 필수과목을 들을 필요 없이 학생 스스로 본인에게 가장 적합한 과목들을 정하고 디자인해서 self-directed study를 한다는 것을 가장 큰 장점으로 든다. 정형화된 생각의 박스에 얽매이지 않고, 학생 스스로 본인에게 맞는 가장 창의적이고 고유한 커리큘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이 학교의 강점이다. 그러다 보니 미국 학부들 중에 학생들의 만족도가 늘 최상위권이고, 실제로 많은 미국 고등학생들이 선망하는 곳이다.   


하지만 나에게 이 오픈 커리큘럼은 양날의 검과도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decision making을 해오며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그 선택에 대해 자신이 있으며, 실패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 한마디로 entrepreneur, 기업가 정신이 있는 - 친구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천상의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대학 이후의 목표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잘하는 게 뭔지 고민해 볼 여지도 없이, '그냥 무조건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라는 단기적 목표로만 살아왔던 나에게 '자, 이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봐!'라고 했을 때, 그것은 달콤한 자유이자 잔인한 혼돈 그 자체였다.   


실제로 이곳에서 만난 미국 친구들은 연극에 몰두한다던지, 새로 개발한 로봇, 화석에 대한 공부, 아프리칸 댄스, 신약 개발에 대한 리서치, 필름 메이킹 등등 너무나 다채로운 분야에서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 공부가 다가 아니구나..' (근데 얘네는 공부도 잘함)라고 생각하며, '나는 뭘 하고 살아야 되지? 내가 잘하는 건 뭐지?'라고 난생처음으로 생존이 아닌 자아탐색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신기했던 점은, 이곳에서 사귀게 된 아시안 친구들은 크게 네 가지 트랙 중 하나에 속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모두 그런 건 아니다). 대부분 의대를 가기 위해 생물/화학 쪽 전공이거나, computer science 전공, investment banker 가 되기 위해 경제학 전공, 또는 로스쿨을 가기 위해 international relations 전공이었다. 그중에 한 친구는 공룡을 너무 좋아해서 고고학을 공부해보는 게 꿈이라고 눈을 반짝이며 말하던 것을 우리 모두 부럽게 쳐다봤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 친구 역시 경제학 전공으로 졸업했다). 지극히 당연하고 현실적인 선택지였지만, 어쩌면 이 곳에서마저 우리 모두 동양적 정서, 이민가정의 문화의 틀 안에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어쩌면 모두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았나 싶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 뭐지? 근데 그걸 해도 되나?'라고 생각하거나, ‘'난.. 뭘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는데. 그냥 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나에 대한 고찰이 없었던 대학시절은, 그야말로 아주 막연한 시절이었다. 단기 목표가 끝나니 간절히 원하는 것도 없었다. 순전히 고등학교 때 미국 헌법 토론대회에 나갔던 경험을 살려 외교관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여 International Relations (국제관계학)으로 학교에 들어왔다. 하지만 외교관이 되려면 일가친척 누구 중에 하나는 대통령이랑 친하거나, 정치인이거나, 외교관 집안이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그럼 내 전공을 가지고는 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또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 1학년이 끝나고 광화문의 로펌에서 인턴생활 생활을 하며 '이 길은 내 길이 아니구먼.'이라고 짐작했다. 늘 혼자 해내야 된다는 강박이 있었던지, 누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용기도, 앞길을 물어볼 겸손도 없이 ‘그럼 법대 아니면 의대지'라고 정말 자아탐색 전혀 없는 무식한 결정을 내렸다. 의대는 공부를 너무 오래 하니까 치대를 가야겠다 생각해서 2학년 때부터는 pre-med track이라는 의대/치대 대학원 갈 트랙을 탔다. 애초에 타고나기를 이과가 아닌 내가 노력한다고 잘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었다. 수업시간마다 머리에 쥐가 나는 것 같았고, 밤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힘들다는 것을 내비치고 포기해버리면 멍청한 루저가 되는 거 같아서, 부모님에게도 친구들에게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아닌걸 아니라고 할 줄 아는 것도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하는 거라는 걸.   


그 와중에도 한 가지 큰 용기를 낸 것이 있었는데, 바로 Visual Arts 미술을 복수 전공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예중, 예고를 갈 것이 아닌 이상 초등학교 이후로는 미술을 배우지 않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나 역시 학원을 다녀본 적도, 그 어떤 기술적 훈련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브라운 대학의 "오픈 커리큘럼"이라는 제도 덕분에 미대로 학교를 입학한 게 아녔어도 미술(유화)을 전공할 수 있었다. 낮에는 화학 실험실에서 고문 같은 실험을 몇 시간씩 하다가 밤에는 페인팅 스튜디오를 찾아가 술에 취한 듯 유화 기름 냄새에 취해 그림을 그렸다. 아무도 오지 않는 한밤중 스튜디오에서 밤을 새우며, 춤을 추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내 키보다 훨씬 더 큰 캔버스에 주먹 만한 붓으로 붓칠을 하는 나는 뭔가에 홀린 집시가 따로 없었다. '난 참 쓸데없어'라고 생각한 시절이었지만, 그때만큼 날것으로 퍼덕퍼덕이며 살아있던 적이 또 있었을까.(실제로 졸업 때까지 전공 전과목 올 A를 받았으니 pre-med track 보다는 점수가 훨씬 나았다). 그 무모한 시도와 방황들이, 안전한 제도라는 특권 안에서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그때는 정말 몰랐었다.   


지금은 가장 많은 질문들을 던져야 할 때

그때는 그렇게 많은 방황을 한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나의 모든 발걸음들은 다 실패와 실망의 도장깨기 같았다. 한 우물을 파야 뭐라도 될 텐데, 난 지금 뭐하는 짓일까.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데, 왜 하나같이 되는 게 없을까. 내가 누군지,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게 뭔지 한 번도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 않은 채, 남들에게 내놓을만한 것들만을 쫓다 보니 나는 이도 저도 아닌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영적 슬럼프도 이 시기에 찾아왔다. 여전히 대학 내 캠퍼스 선교단체내에서 리더로 열심히 활동했고 성실히 종교 생활을 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종교"생활일 뿐이었다. '진짜 하나님에 계시긴 한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세상에 이런 일들은 왜 있는 거지?'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현존하는 분이라면서, 왜 그럼 다 아시면서 그냥 내버려 두시는 걸까?' 그전까지는 무조건적으로 믿으면 된다고 생각한 하나님을 향한 여러 가지 질문들이 폭포수같이 쏟아졌다. 하지만 하나님께 질문할 수 있다는 것, 해도 된다는 것을 몰랐던 나로서는 이런 마음들을 "의심" 혹은 "불신"이라고 생각해서 스스로를 정죄했고, 그 누구에게도 물어보거나 털어놓지 못했다. 교만과 두려움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어차피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고 느꼈고, 그런 나의 바닥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몸부림치며 떠올라야 하는 것이고, 반드시 살갗으로 부딪혀야 하는 것이다. 내가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꼭 말해주고 싶다.  


불안해하지 말고 마음껏 탐색해보라고.

그 방황 자체가 너의 자산이 될 거라고.

잃어 보지 않으면 무엇을 가졌었는지도 모른다고.

아무것도 늦지 않았으니까 일단 시작해보라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어느 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말라고.

네 인생은 실패가 아니라고.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다고.

너는 지금, 꼭 해야 하는 걸 하고 있다고.

너는 정말 용기 있는 애라고.

그러니까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하지 말라고.  




얼마  어떤 작가님과  시간 넘게 이야기를 하며  지난 시간들을 돌아본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이민을  이야기로 시작해, 국제 정치학을 공부하다가 미술을 전공하고 치대 입시를 준비하고, 교육학으로 석사를 갔다가 교육컨설팅을 했다가 박사학위를 위해 연구실에 있다가 지금은 어쩌다() 글쓰기를 하고 있는지. "그래서 저는 아주 얕고 - 지식갖고 있어요. 푸하하"겸연쩍게 웃는 나에게 그분은 웃지 않고 질문하셨다. "윤승님이 갖고 계신  모든 경험들은 정말 고유하고 깊은 경험들인데,  방황이라고생각하세요?"  말이 없었다. 어쩌면 나의 모든 이야기들 속에 아직도 '이건  시행착오의 기록이지 성공의 기록은 아니에요' 세상적인 성공의 잣대로  경험들을 평가절하하고 있었던  아닐까.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던 나의 방황기였지만, 무엇하나 소홀히 하지 않았던 작은 성실의 씨앗은 그 와중에도 잠잠히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어 나가고 있다. 어쩌면 그 헤메임과 고민들 덕분에, 나는 아이들에게 좀 더 포용적인 엄마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두드려본 덕분에, 아이가 어떤 것을 관심 있어할 때 적어도 탄력 있는 스프링보드가 되어줄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나는 나를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인생은 한 길로 쭉 가는 사다리가 아니라, 이리저리 방향이 꺾여가도 어쨌든 멈추지 않고 가다 보면 목적지에 도달하는 정글짐 같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정글짐 어딘가에서 애를 쓰고 있다. 갑자기 길이 없어지기도 하고 커브길이 생기기도 하지만, 늘 새로운 길은 생기기 마련이다. 내 이름 뒤에 따라오는 글자 몇 개를 위한 삶이 아닌, 내 이름으로 풍족한 삶. 내 이름의 의미가 삶 가운데 발현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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