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저는 남의 기대에 부응해야만, 남을 실망시키지 않아야만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가족 안에서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고, 학교에서는 모범생인 척, 공부에만 관심 있는 척하며 노력했어요. 직장에서는 회사의 기준이나 상사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애썼고, 어느 집단에 속하든 그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눈치를 굉장히 많이 보게 되었는데요. 누군가를 실망시키게 되거나, 내가 삐끗해서 뭘 잘못하거나 실수했을 때, 그게 단순히 ‘실망시켰구나’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무런 가치가 없구나'라고까지 가서, 완전히 모든 의욕을 잃어버리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최근에도 회사에서 잘못한 일이 있었어요. 그때도 비슷한 감정이 밀려와서 ‘내가 여기서 잘하지 못하는구나.’라는 생각 때문에 갑자기 ‘그만둬야 되나’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갑자기 모든 게 무너지는 것 같았죠. 평소와는 다르게, 내가 쌓아왔던 모든 노력들, 모든 희망들, 나 자신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무너져버리는 기분이었어요. 그 순간부터 내가 계획했던 모든 것들, 나의 현실적인 기반 자체가 완전히 흔들리고 무너져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정말 자다가도 벌떡벌떡 깨고, 자고 일어나서도 아침부터 그 두려움에 휩싸여서 심호흡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할 정도의 엄청난 두려움을 겪었어요. 눈물만 나오고, 무섭고 너무 두려워서 ‘나는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다’라는 생각까지 들었죠. 모든 게 다 무너져버린 것 같아서 정말 죽을 것 같았습니다. 이런 증상을 처음 겪는 건 아니었는데, 유독 그때는 심했어요.
그때 전과 다르게 했던 것은, 전에는 무작정 저를 진정시키고 긍정적인 생각 회로를 돌렸는데 이번에는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가족과 친구에게 연락한 것이었어요. 아, 이번엔 그냥 유일하게 그것밖에 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나를 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나를 위해 달려오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신기한 경험을 했어요.
사실 엄마와 저는 그렇게 알콩달콩 사이좋은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전화를 했을 때도 솔직히 반신반의했어요. 엄마의 강한 다그침에 다시 가루가 되고 부서질까 봐요. 하지만 제가 말없이 울자 같이 울면서 달려온 모습을 보며 그 순간 완전히 새롭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한동안은 ‘난 그냥 이 사랑만 있으면 살겠다.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엄마한테 받는 사랑만 있으면 대충 살아도 되겠다’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그 사랑에 집착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사랑이 꼭 '엄마니까' '엄마한테만 받을 수 있는 절대적인 사랑'이라는 환상적인 종류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솔직하자면 엄마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번 밑바닥 같은 두려움을 겪고 나서 '제 안에서 뭔가 회복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게 표현하기 참 어려운데, 엄마는 예나 지금이나 당연히 변함없는 엄마였죠. 엄마의 행동, 말투, 저를 대하는 것들도 변함없는 엄마인데 제가 그걸 받아들이는 마음 자체가 달라짐을 느꼈습니다.
전에는 엄마의 말이 ‘엄마가 날 마음에 안 들어하는구나.’라고 느껴져서 상처받고 갈등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같은 말을 들어도 ‘엄마의 저 말은 사랑이구나’라고 사랑으로 느껴졌습니다. 글로 쓰니 간단한데 이게 저한테는 정말 신기한 변화예요.
마치 거울 같았어요. 내 안에 미움이 있을 때는 미움을 비춰주고, 내 안에 사랑이 있을 때는 사랑을 비춰주는 거울처럼, 엄마의 모든 게 사랑으로만 느껴지는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여전히 잘하고 싶고,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은 당연히 여전합니다. 하지만 전에는 ‘그만둬야겠다’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었다면, 지금은 ‘못하면 못하는 채로 그냥 하자’ 정도가 되었어요.
그 사랑을 경험하고 나니, ‘여기서 좀 미움받아도, 좀 못한다고 질책을 받아도 괜찮아’라는 태도가 생겼습니다. 한결 여유가 생긴 거죠. 이 태도는 회사뿐만이 아니라 친구들이나 관계를 맺는 모든 인간관계에도 영향이 갔습니다. 전처럼 잘 보이려고 무진장 애를 쓰지도, '저 사람이 날 싫어하면 어떡하지?'하고 미리부터 전전긍긍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제가 다른 사람이 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적어도 하나의 구덩이에서는 구해진 것 같아요.
저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낄 수 있고,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누군가를 실망시켜도, 기대에 못 미쳐도, 미움받는 건 당연히 힘들고 아프죠. 하지만 그래도 제 안에 변하지 않는, 결코 훼손될 수 없는 사랑이 있음을 느낍니다.
제가 구해졌듯, 이 글이 누군가의 깊은 구덩이에서 작은 빛이 되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