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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로운 Aug 31. 2020

토요일의 과카몰리

우리 집엔 우렁각시가 산다

너무 물렁해져서도 안되고, 너무 딱딱해서도 안된다는 아보카도. 야구공만큼의 아주 얄팍한 말랑함이 바로 이 못생긴 음식이 가장 잘 익은 순간이라고 했다. 꼭지를 똑 떼어내고 나면 속에 들여다 보이는 색이 연둣빛이어야 한다. 조심조심 반으로 갈라 커다란 씨를 발라낸다. 부엌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잘 익었다! 검정빛에 가까운 초록색 외피와 달리 그 안은 노르스름한 안쪽부터 예쁜 연두색의 바깥쪽이 보들보들하게 드러난다. 채소류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이 버터 같은 요상한 질감이란. 푹푹 파내서는 신나게 으깨라는 것이 토요일 오전 널브러져 있던 나에게 떨어진 미션이었다. 그리고 우리 집 식탁에는 토스트기에서 튀어나온 따끈한 식빵과 함께 양파와 아삭한 채소를 넣은 고소하고 상큼한 과카몰리가 올라왔다.


요리라면 오롯이 먹는 행위와 맛 그 자체에만 관심이 있는 나는 유튜브의 수많은 요리 채널도, 모두의 요리 선생님인 백종원의 영상에도 관심이 없다. 하다못해 우리 아빠도 백 선생님의 부추전 영상을 보곤 신나게 시도해보는데, 나는 요리라면 만사가 귀찮은 사람이다. 설거지를 하라면 했지 도마질은 무슨 양념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집에 혼자 있으면 뭘 차리기가 너무나도 귀찮아서 먹는 걸 포기할 정도니. 자취 3년 차, 그럼에도 불구하고 굶어 죽는 일 없이 내가 살아 있는 이유. 우리 집에는 감사하게도 우렁각시가 산다.




우렁이는 자취를 시작하던 첫 해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해 처음으로 취직을 한 나는 매일 정확히 2호선 반 바퀴를 돌아 출퇴근을 했다. 내선순환을 타도, 외선순환을 타고 똑같이 1시간이 걸리는 거리에 지쳐 집에 기어들어오면 아무도 없는 자취방에 짜잔 하고 저녁이 차려져 있었다. 카톡이 하나 톡 하고 날아왔다.


'언니 밥이랑 찌개는 한번 더 데워먹어.'


처음에는 엄마가 보내준 반찬 꺼내기에서 시작해 어느새 계란말이도, 김치찌개도, 처음 맛보는 볶음밥과 파스타도 뚝딱뚝딱 차려내게 된 우렁이의 요리 솜씨는 점점 발전하고 있었다. 나라면 한 시간은 끙끙댔을 요리들이 순식간에 차려져서는 끝내주는 맛을 자랑하다니.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 이면에 우렁이는 온갖 옷이며 물건이며 다 쓴 휴지며 여기저기 가득 쌓아놓고 고대로 방치하는 스타일이라, 둘이 살기 시작한 자취 초반엔 간간히 잔소리를 해야 했다. 그러나 살아보니 이런 생활 습관은 화내고 뭐라고 한다고 고쳐지는 것이 아니더라. 고쳐지려면 초등학생 때 이미 고쳐졌을 습관이겠지만, 대학생이나 된 나이에 엄마도 혀를 내두른 지 오래다. 퇴근 후 집에 들어와 안 그래도 좁은 자취방 책상 가득 쌓여있는 잡다한 것들이 혈압을 높였는데, 그런 나를 솜사탕 녹이듯 샤르륵 녹여낸 것이 바로 우렁각시처럼 정성담아 차려놓은 저녁밥이었다. 나는 눈물 나게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싸악 청소를 하며 저녁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역할 분담이 됐다.




무려 네 살 차이나 나는 자매지만 그렇게 차이가 나는지 실감을 못할 정도로 우렁이와 나는 친구처럼, 룸메처럼, 가끔은 언니와 동생이 바뀐 것 같이 살고 있다. 어릴 적 한 두 번이 아니면 크게 싸워본 적이 없고, 최근 유행했던 MBTI 궁합도 우리는 최고의 조합이라고 한다. 말수가 없어서 이것저것 속마음을 편하게 털어놓는 성격이 아닌 나는 우렁이 앞에서 수다쟁이가 된다. 끝도 없이 주제가 생각나고 별것도 아닌데 같이 빵빵 터지곤 한다. 자매가 둘만 같이 살면 사이가 나빠지기도 한다던데, 나는 우렁이와 퍼즐같이 딱 맞아 들어가는 사이가 되어가고 있다.


"동생이 저녁밥을 차려준다고요?"


우렁이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거리가 되었다. 나는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동생을 가진 언니가 되었다. 그러면 나는 기분이 좋아서 일찍이 카톡을 보냈다.


'오늘 저녁 황금올리브치킨 콜? 언니가 사줌'

'콜'




과카몰리는 멕시코에서 나쵸나 브리또와 같이 먹는 '아보카도로 만든 소스'라고 한다. 어디서 먹어본 적도 없는 남미의 소스를 만들어 보겠다고 우렁이는 금요일부터 신이 나있었다. 아보카도는 따는 순간부터 익기 시작한다고 한다. 잘 익었나, 이 말랑한 촉감이 맞는 걸까 두 시간에 한 번씩 확인하던 그는 마침내 맛 좋은 과카몰리를 만들었다. 으깬 감자 같은 질감에 오묘한 고소함, 보드라움, 빵 위에 가득 얹고 그 위에 얹어 먹는 계란과 맵게 볶아낸 새우까지. 아보카도와 아포가토를 헷갈리는 우리 아빠도 인정한 맛이었다.


해피한 토요일 오전이다. 초록 초록한 음식이 햇살 좋은 주말 아침과 잘 어울린다.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냐며 놀라워하는 엄마와 뿌듯해하는 우렁이, 한입만 어떻게 먹어볼 수 없나 눈치 보는 식탁 밑의 강아지. 평화롭고 기분 좋은 날.


이대로 가다간 나는 영영 요리와 담을 쌓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찰나, 그냥 이런 맛있는 걸 해내기 좋아하는 우렁이랑 앞으로 오래오래 쭉 같이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이 드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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