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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로운 Jun 23. 2020

영영 잃어버린 기억에 대해

아흔, 우리 할머니

주말에 집에 내려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요양원에 계시던 할머니가 기관지가 좋지 않아 큰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이제는 요양병원에 모셔야 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지셨다고 했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후에는 코로나 때문에 면회가 금지되 할머니를 뵙기 어려워질 테니, 미리 가서 뵙자는 전화였다.


30년도에 태어나 만주에서, 부산에서, 서울에서 사셨던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만나 딸 넷과 아들 둘을 낳았다. 아들들을 머리에 이고 살았던 증조할머니의 시집살이에 시달렸고, 툭하면 밥상 뒤집어엎는 성질 더러운 작은할아버지들과 그 식구들까지 먹여 살렸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할머니는 미국에 있는 막내딸 집에도, 지방에 있던 작은 아들 집에도 동해 번쩍 서해 번쩍 자유롭게 다니셨다. 몸이 불편해졌어도, 혼자 사는 것이 외로우셨을만한데도 할머니는 여섯 명의 자식 그 누구 집에도 얹혀사는 것을 거부했다. 자식들에게 어떤 짐도 되기 싫다는 할머니의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어느 때에도 큰 감정의 동요가 없던 할머니의 씩씩함은 그 작은 몸집을 거인처럼 보이게 했다.


어느덧 아흔이 되신 할머니는 우리 집 10분 거리의 요양원에 계다. 오랜 시간 혼자 우두커니 지키던 청량리 집에서도, 큰아버지 집에서도 계시기 어려울 만큼 치매가 진행되고 몸이 불편해지셨기 때문이었다. 요양원이 우리 집에서 워낙 가까워 주말마다 할머니를 모시고 산책을 했다. 아빠는 휠체어를 끌며 할머니께 두런두런 말을 걸었다. 랜 세월을 사셨던 복작스러운 서울과 달리 물소리도 바람소리도 들리는 이 동네에서, 할머니는 매일 꿈속처럼 몽롱한 상태이실 거라고 아빠는 생각했다. 할머니는 나를 매번 알아보지는 못하셨지만, 동물을 너무나도 좋아하그 마음 그대로라 같이 나온 우리 강아지를 보고는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아빠 차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다. 비가 오는 아침이었고, 병원 앞 오래된 아파트 담장 위로 붉은 장미가 쏟아질 듯 피어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대형 병원의 모습은 진공상태로 밀봉된 심장 같은 느낌이었다. 모든 입구가 쇠사슬 같은 것으로 꽁꽁 묶여 폐쇄되어 있었다.  철저하게 체온체크과 서류작성 마친 후에야 한 명씩 병원 내에 입장할 수 있었다. 그 당연한 절차가 코로나가 이 시대에 짊어준 위압적인 분위기를 더욱 실감 나게 했다. 가족 네 명이 같이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엄마 아빠가 한 명씩 병원에서 나온 후에야 혼자 들어갈 수 있었다. 미로 같은 병원을 돌고 돌아 폐쇄되지 않은 길로 병실을 찾아가야 했다. 다른 어떤 때보다 더 조용하고 무서운 분위기의 병원 복도를 걷는 동안, 어떤 건지 알 수 없는 기분 속에 나는 할머니를 생각했다.


만날 때마다 뽀뽀를 하거나 사랑한다고 말하는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뚝뚝함과도 거리가 멀었던 할머니는 나에게 항상 인자하고 강한 느낌이었다. 같이 살지는 않았어도 어릴 적 우리 집에 내려와 계실 때도 있었는데, 나는 그 흔한 "옛날 얘기해주세요 할머니"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90년 인생에 대해 아는 것이 한 문단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할머니, 만주 집은 어떻게 생겼어요?

할아버지랑 결혼하는 날은 어땠어요?

할머니는 뭐 하는 걸 좋아했어요?

어릴 땐 어떤 친구가 있었어요?"


삶의 모든 순간에서 할머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제는 물어도 답할 수 없는 기억 속 어딘가에 감정으로 켜켜이 쌓여 이루어진 90년의 시간을, 나는 이제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어두운 복도 한가운데, 한 번도 묻지 못한 질문들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어딘가가 텅 빈 것 같았다.

 



대학생이었던 어느 여름, 약속이 있어 버스를 타고 이동하다 두세 정거장을 일찍 내렸다. 할머니 집 근처였다. 그 날은 문득 청량리 할머니 집에 혼자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근처 꽃집에서 관리가 쉬운 화분을 하나 골라서는 할머니 집으로 걸었다. 곧 꽃이 피기 직전이라는 꽃집 아저씨의 말에, 할머니가 좋아하시길 바라면서.


혼자서 찾아간 것은 처음이었다. 그전에 더 자주 올걸, 묘한 기분에 문을 열었다. 할머니는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더 멍한 상태다. 치매 때문에 라고는 하지만, 네가 누구인고 한참 쳐다보시길래 저 누구예요,라고 말하자 긴가민가 하는 옅은 웃음을 띄어보이셨다. 할머니가 마주 보고 앉아있는 TV 옆, 잘 보일 만한 곳에 화분을 두고 이름은 이 거래요, 잘 보여요? 예쁘죠? 곧 꽃이 필 거래요, 하고 나는 종알종알 말을 했다. 응, 대답은 하셨지만 다른 대화는 하지 못했다. 할머니 옆에 가만히 앉았다. 더 일찍 이렇게 왔었다면 더 좋아하셨으려나.


그 날의 기억 속 할머니 방 회색빛일 정도로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상태로 조용했고, 작았다. 반응 없이 가만히 앉아 계시는 뒷모습에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떠나고 나서도, 내일도 그다음 주도 이렇게 앉아계실까.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많은 기억을 잊으셨으니, 외로움도 잊어버리신 거면 좋겠다.




병실에 도착했지만 곤히 주무시는 할머니를 깨울 수 없었다. 가만히 할머니 손을 잡았다. 우리 강아지를 보고 아이 예쁘다고 웃는 몇 달 전 표정이 겹쳐 보였다. 그때 그 순간의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저 영영 잊힐 오랜 기억이 아쉬워서, 할머니의 회색빛 방이 자꾸만 마음에 남아 글을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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