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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로운 May 11. 2020

찰나의 실수로 29만 원을 긁은 날

이번엔 마음을 고쳐먹으라는 뜻이야

Think I hit the bottom of myself
Someone come and mend this broken heart
Cuz I’m tired of myself
 
NIve - Tired


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터진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일이다. 계단을 내려와 현관문을 열자마자 절대 손에서 떨어져서는 안 될 그것이 미끄러져 바닥에 부딪히는 순간. 할부가 17개월이나 남아있는 그 스마트폰의 액정이 와작 깨져버린 것을 발견한 그 순간.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을 괜찮다며 애써 다독이고 현실을 받아들여본다. 일단 피해상황부터 파악하자. 터치가 안 될 정도는 아니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괜찮다, 는 무슨 아래쪽이 박살 나고 위아래로 금이 쭉쭉 갔다. 검색을 해본다. 이 핸드폰의 수리비는 29만 원이라고 한다. 나는 보험도 들지 않았고, 사전예약도 하지 않았다. 쌩돈 29만 원이 고대로 빠져나갈 상황임을 정확히 인지하고 나서야 찰나의 사건이 얼마나 큰 문제를 불러오는지 뼛속부터 느낄 수 있었다.


“뭐 이렇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지?”


말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가만히 잘 있던 것들도 이 핸드폰 마냥 박살 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매우 우울해졌다.




그동안 너무나도 잘 사용했던 지난 핸드폰들은 모두 오랜 기간 어떤 문제도 없다가, 갑작스럽게 액정이 부서지는 사고를 겪었다. 그러고 나면 수리하는 대신 다른 핸드폰으로 바꾸곤 했다. 나는 그 시기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변화와 일치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시기. 가장 오래 사귀었던 예전 남자 친구와 밑바닥을 볼 때까지 싸우던 끝에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랬고, 마지막으로 도전한 임용시험에서 불합격한 후 그 지겹고 힘들었던 공부를 때려치우자 마음을 먹으면서 그랬다. 거의 내 몸에 달라붙어 있다시피 24시간을 늘 함께한 분신 같은 물건은 ‘이제 그만 새로 시작해’라고 말하듯이 그 시기에 맞춰 수명을 다했다. 고마웠어, 하고 좋게 보내줄 수 있었고 그 시기에 따라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거나, 취업하는 등 지금의 내가 있게 해 준 그때의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었다.


이번엔 뭘까. 고작 몇 개월 사용한 핸드폰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도 없고, 이대로 사용하자니 화면을 볼 때마다 답답함과 함께 29만 원의 금전적 손실이 연상되어 괴롭다. 하루가 지났고, 문득 어차피 방법이 없는 것, 그냥 바로 가서 수리나 맡기자는 생각에 반차를 내고 삼성서비스센터로 걸어갔다. 마음을 먹고 나니 차분해지는 것이 있다. 걸어가는 내내 날이 좋았다. 살랑살랑한 봄바람에 허탈하면서도 정리가 되면서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저것 생각을 해 본다.


그 전의 비슷한 상황들과 비교하자면, 지금 내가 맞닥뜨린 것들은 더 이상 마음먹는다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지난 2년간 자리를 비우기가 버거울 정도로 바빴던 회사였는데, 가볍게 반차를 내고 일어나다니. 몸담은 업계는 코로나 직격탄을 맞아 엉망으로 돌아가고 있고, 미래 예측도 어려운 상황이다. 너무나도 즐거워서 사랑했던 일이 이렇게나 사장되는 모습을 손 쓸 방법도 없이 몇 개월간 지켜만 보고 있으니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그간 있었던 일들과 현실을 모두 뒤로하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밀려오는 감정에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어쩔 줄을 몰라 눈물이 났다가, 다시 꾹 눌러 담고 다시 마음 한 구석 깊은 곳에 넣어 잠가버린다. 감정은 생각과 달라서 의지를 가진다고 새로 생기거나 쉬이 없어지지 않더라.



“어쩔 수 없죠, 그냥 해주세요”


수리비용이 꽤 큰데 보험이 없는 걸 안타까워하는 서비스센터 직원분의 말에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보니 나는 생각보다 덤덤해진 것 같다. 고의로 핸드폰을 고문하거나 바닥에 내동댕이친 것도 아니지만 어쩔 수 없으니. 핸드폰을 맡겨두고 약 30분을 멍하니 앉아 기다렸다. 손에 늘 찰싹 붙어 있는 그것의 존재는 매우 커서, 그 30분이 너무나 지루한 나머지 3시간처럼 느껴졌다. 뭘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다가도 아, 핸드폰,하고 가방을 뒤져보다가 아차 싶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29만 원이 뭐가 아까워, 하는 생각이 들어 나름의 자기 합리화를 해본다.


‘백만 원짜리 핸드폰이면 이제 백삼십만 원짜리가 되는 거지 뭐’


새로 바꿀 수도,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 그냥 처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고쳐 써야 한다. 고장 난 것 같은 일상도, 마음도 다 때려치우고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바꿀 수는 없으니, 똑같지. 이제껏 받아들이는 방법을 잘 몰랐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어도 손 쓸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 갑작스러운 사건이 이 정도로 나를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어려우니까.


지금까지 내가 했던 모든 선택이 옳았던 걸까, 어디서 무슨 선택을 해서 나한테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걸까 자책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게 틀림없어, 그래서 나는 벌을 받는 걸 거야.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 정도로 힘들 리가 없어. 그런 생각들을 시작하면 끝이 없는걸 잘 알면서도 부정적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이 모든 걱정과 고민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방법은 아직도 모르겠어서, 차라리 29만 원을 내고 고쳐달라고 어디 서비스센터에 맡길 수 있다면 좋겠다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좋은 마음을 먹는 일이다. 차차 덤덤해지는 일이고, 온갖 부정적인 것들로 가득한 내 마음을 고쳐먹는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고, 어느 날 갑자기 좋은 일이 생길 것이고,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


정말 뜬금없이 심심하게 앉아있던 그 와중에 어디서 이런 말이 들렸다.

현실에 가정이라는 건 없어. 지나간 것들을 바꿀 수는 없잖아. 얼마나 많이 하는 고민이면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는 곡이 전 국민의 사랑을 받겠어.



완전히 수리된 깨끗한 핸드폰과 영수증을 받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얼마가 들었건 이제 내 손을 떠난 돈은 이제 생각이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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