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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로운 Apr 23. 2020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건

어제와 다르게 살기로 했다

말이 잘 안 나와요 아니 말을 몰라요
넘치는 사랑을 표현할 수가 없어요
 
AKMU - 외국인의 고백


임용 공부를 하던 시절 그 날의 스터디를 다 끝내고 나면 한 치 앞도 모르는 답답함에 친구들과 서로의 힘듦을 공유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요즘 시대 명언처럼 내가 힘들다고 네가 덜 힘든 것은 아니고, 네가 힘들다고 내가 덜 힘든 건 아니지만, 같이 어려운 입장에서 서로만큼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어려움의 토로로 시작한 대화는 그 암울한 현실보다 언뜻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합격 이후의 미래에 대한 더 긍정적인 이야기로 마무리지어졌다. 그러다 보면 에너지를 얻었다.


“저는 이탈리아어를 배울 거예요”


우리가 공부하던 것이 영어였기 때문에 원어민이 아니라면 이 영어공부라는 것에서 영어 교사가 되든 아니든 평생 벗어나지는 못할 테지만,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점수를 따기 위해서, 무슨 스펙을 얻기 위해서 공부하는 언어가 아닌 그냥 오롯이 내 재미를 위해서 언어를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왜요?라고 누가 되묻는다면 나는 재밌을 것 같아서요.라고 답했다. 같은 이야기를 부모님과 했을 때에는,


“그러지 말고 중국어를 더 하지 그러니”


라는 되물음을 받았다. 그렇지, 여기저기 쓸데 많은 중국어를 하면 득이 되는 것이 많을 것이다. 여행으로 여러 번 가봤자 손에 꼽을 정도인 곳의 언어보다는 “실용적인” 언어를 배우는 것이 훨씬 낫겠지 싶어도 하기 싫은 것은 죽어도 손에 안 잡힌다. 특히 지금과 같이 모든 것이 지겨운 때에는,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이 이렇게도 답답할 때에는 더더욱.


그래서 지금이었다. 이탈리아어를 배워보자.



시작은 우연한 기회에 추천받아 써보게 된 귀여운 어플 때문이었다. 간단하게 매일 5분, 10분 등을 정해 언어를 쉽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심심해서 한 두 번씩 눌러보다가 성취감이 들게 되는 묘한 맛이 있었다.


언어교육을 공부했던 경험은 교육 쪽에서 발을 돌린 이상 나에게는 세상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 나름 쓸모가 있다. 체계적으로 한 스푼 한 스푼 혹시나 흘릴까 손으로 받쳐주며 떠 먹여주는 것이 일반적인 인강의 방식이라면 이 어플에서 차용하는 방법은 학습자가 언어에 조금씩 노출되는 과정에서 확장을 거듭하고, 유의미한 추론을 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관련한 교육학적 개념을 그렇게 열심히 외웠건만 다 잊어버렸다.)


아주 기본 단계에 들어서면 단어부터 배우게 된다. 간단하게 퀴즈를 푸는 방식으로, 원어민의 발음을 듣고 문장의 강세를 배우고 단어가 들어있는 문장을 접한다. 명확하게 “io”는 “나”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지만, 문장을 거듭하고 회를 거듭하며 “io” 다음에는 “sono”가 be동사의 형태로 들어오며 이후 내가 들어가는 동사는 “o”라는 어미가 붙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탈리아어를 맛만 보았다고 했을 때, 이 언어의 첫인상은 이렇다.


이렇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언어가 있나.


주어와 동사가 라임을 이룬다. 부드럽게 지나가기보다는 통통 튀는 듯 흐른다. ‘r’ 발음을 위해 혀가 자동으로 또르르 굴러가게 하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나한테는 정말 잘 안 되는 발음인데, 평소보다 크게, 더 세게 발음하면 되더라는 것을 오늘 알았다.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 더 많이 배우고 싶은 언어. 여성명사 남성 명사 온갖 문법에 들어서면 헷갈리게 되고 머리를 쥐어뜯게 되겠지만. 가까운 미래에 이탈리아 어느 소도시의 현지 사람과 조곤조곤 이야기하며 쓸 수 있는 날이 오길 막연히 상상해본다.




약 12년 전, 부모님과 패키지여행으로 서유럽에 갔었다. 신나서는 이번 겨울에는 서유럽 몇 개국에 가게 됐다고 이야기했는데, 당시 다니던 국제학교의 유럽 친구들이 그 일정이 말이나 되냐고 혀를 내두르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걸 해내는 대단한 대한민국 하나투어 패키지여행. 거의 하루에 1개국을 찍는 일정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가장 오래 머물던 곳이 이탈리아였다. 로마와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나폴리까지 돌며 유명한 지역은 다 가보았다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곳에 있었던 기억은 없고 사진으로 그곳에 방문을 했음을 증명하는 정도가 되었다. 아, 그래도 기억에 남는 것은 아빠가 파스타에 홀딱 반하게 된 계기가 된 맛있는 파스타집과, 공항에서 남는 시간에 잠깐 사 먹은 조각 피자이다. 그 외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니, 안타까움도 이런 안타까움이 없다.


이탈리아 음식을 먹으러 꼭 다시 돌아가겠노라 생각한 것은 그 오래전부터이고, 서양사에 빠져서 그시대 유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로마에 대한 환상이 생겼고, 최근에는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았다. ‘도그맨’이라는 영화와 ‘로마 위드 러브’라는 영화. 두 영화는 배경이 이탈리아 어디라는 것을 빼면 공통점이 없다. 도그맨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람했던 작품이자 건조한 화면에 충격적인 스토리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매우 먼 영화이고, 로마 위드 러브는 우디 앨런 감독이 직접 출연하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코미디 영화이다. 마음에 드는 영화가 생기고, 그 영화를 자막으로 보다보면 그 언어로 번역되지 않은 말 하나하나를 직접 이해하고 싶어 진다.


나에게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동기부여가 필요한 일이다. 파파고와 구글 번역기가 이렇게나 잘 갖춰진 세상에서, 무작정 언어를 배우자 하면 의욕이 생기지를 않고, 스펙으로 자격증을 따자 시작하면 점수에 스트레스를 잔뜩 받는다. 그러고 나면 다 싫어진다. 학생들 앞에서 영어 수업을 할 때, 가장 어려웠던 것이었다. 내신을 잘 받아야 해서, 수능을 잘 봐야 해서, 대학에 들어가야 해서, 공인점수를 따야 해서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의욕을 불어넣어줘야 하나. 교수자의 입장을 벗어난 지 3년 차, 다시 학습자로 돌아와서 아주 막연히 새로운 언어에 발을 담가보니, 그 고민에 새삼스럽게 답이 보였다. 시험을 걷어내고, 외부의 강요와 무조건이라는 의무를 걷어내고, 언어를 언어 자체로 볼 때. 그때 흥미라는 것이 생긴다. 발음이 재밌어서, 들리기에 예뻐서, 그 나라에 가보고 싶어서, 말을 해보고 싶어서. 의욕은 아주 단순한 호기심에서, 호감으로 발전하며 생겨난다.




이제 막 시작했으니 갈 길이 멀다. 시작한 것은 꾸준히 해나가려고 한다. 어느 날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길.

코로나로 힘든 모두의 고통이 하루빨리 사라지고 좋은 날이 오길 간절하게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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