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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로운 Sep 07. 2020

소주 대신 마이구미

금주 한 달째입니다

우울증 치료를 시작한 지 딱 한 달이 지났다. 의사 선생님과 금주를 약속한지도 딱 한 달이다. 그동안 알코올이란 단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슬금슬금 술 끊겠다고 나섰던 과거의 나는 모두 실패였다. 오늘은 힘들었으니까 마시고 내일은 약속이니까 마시고 하다 보면 취할 정도는 아니어도 매 번 혈중 알코올이 돌게 되는 것이다. 술은 지금의 나에게는 독약과 같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고, 이번엔 제대로 마음을 먹었다. 얼마나 굳게 마음먹고 참았는지 나도 모르게 막걸리를 홀딱 마셔버리고는 내내 후회하는 이상한 꿈을 꾸기도 했다.




술을 잘 먹지는 않지만 술자리를 좋아하던 나는 배부른 맥주보다는 소주파였다. 대학교 때에는 5시부터 수업이 끝나면 단골집에 죽치고 앉아 집에 가기 직전까지 동기들과 짠을 외쳐대며 이슬을 마셨다. 인심 좋은 사장님이 서비스로 짜파구리를 끓여주시던 신촌의 술집, 수도권 이곳저곳에 거주하는 모두가 모이기 좋던 사당역 술집, 대왕햄치즈계란말이를 먹으러 주기적으로 가던 숙대입구의 술집, 최근에 없어진 회사 근처의 저렴하고 예쁜 갬성 와인바까지. 여럿이 모여 시끄럽게 오늘 들은 강의 이야기와 연애담부터 시작해 세상 걱정 없이 수다 떨던 가벼운 술자리는 시간이 지나며 줄어들었다. 그 모습은 너와 나의 힘든 일들을 굳이 입밖에 꺼내지 않고도 서로를 다독이는 소수의 모임으로 바뀌었다가, 업무 스트레스와 결혼 이야기가 주된 안주가 되는 요즘이 되었다. 그리고 술자리가 좋아 마시던 술이 어느 날부터는 혼술이 되었다.


좋은 날이면 좋다고, 힘든 날이면 힘들다고 마시다 보면 흔한 말처럼 술이 술을 부른다. 혼자 마신 어제의 술이 오늘의 술이 되고, 왠지 덜 취한 것 같으니 더 먹자고 달려들게 되니까. 즐거움이 취기로 인해 배가 되면 다행이지만, 우울한 감정은 무조건 알코올로 부스터를 달고 사람을 저 바닥까지 끌어내린다. 혼술이 나쁜 이유, 우울증에 술이 최악인 이유다.




술이 없으니 알게 된 것은 도대체 사람을 만나 술 먹는 것 외에는 뭘 하고 놀았는지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다. 술을 먹으면 괜히 말이 많아지고, 취한 김에 논리적인 말을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이 좋았나, 하이 해지는 기분이 좋았나. 술로 스트레스를 풀고 술로 사람을 만났던 내 과거가 새롭게 보이는 날이다. 한편으로, 이제까지 술기운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말들을 꺼내곤 했는데, 제정신으로도 가능할까 의구심도 든다. 삼겹살이라도 먹을 땐 소주 한 잔만 꼴깍 먹고 싶다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주로 가장 좋은 것은 반강제로 야식을 먹지 못한다는 것이었고, 다음날 끔찍한 숙취에 머리가 아프거나 속이 아플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맥주라도 캬 들이키고 싶은 더운 날에는 탄산수를 마셨다. 건강한 식사 운동을 시작한 동생을 따라 나도 따라서 배달음식을 줄여나갔다. 늘어나기만 하던 몸무게가 자연스럽게 줄었다. 카드값도 줄었다. 술값과 안주값으로 나가던 돈이 통장에 쌓였다.  




영화 '극한직업' 이병헌 감독님의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는 술과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오죽하면 드라마에서 술냄새가 난다고 할 지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내 인생 드라마이기에, 술 하면 떠오르는 대사를 인용해보려고 한다.

사실 떡볶이는 맵기보다 달다. 소주도 쓰기보다 달다.

모두들 첫 잔이 달다고 느껴지는 날 술이 잘 받는 날이라며 벌컥벌컥 마셔댄다. 약간의 달고 쓴맛에 홀딱 취하는 그 기분 때문에 과거의 나와 오늘의 수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그것.


하지만 인생이 이미 쓴맛이라, 이제는 단 맛만 먹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술이 먹고 싶은 날, 오늘의 나는 890원짜리 마이구미를 먹는다. 포동 하고 묵직한 젤리. 말랑함이 다른 젤리보다 맘에 드는 어릴 적 먹은 그 포도맛. 첫맛은 밍밍하고 갈수록 달달하다. 어느 날 갑자기 천원도 안 되는 가격에 동네 가게에서 얻은 행복이다.


금주 한 달째, 술에 대한 다음 글은 금주 1년째 후기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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