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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로운 Apr 23. 2020

강아지의 시간

어제와 다르게 살기로 했다

난 너로 인해 많이 울게 될 거라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보다 많이 행복할 거라는 걸 알아

가을방학 - 언젠가 너로 인해


집에 가는 발걸음은 바쁘고 설렌다. 급한 마음으로 현관 번호를 누른다. 문이 열리면 흰 솜뭉치 같은 게 꼬리로 날아갈 것 같이 춤추며 뛰어온다. 귀는 어디로 갔는지 뒤로 납작해져 머리와 몸통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는 눈으로 말을 한다.


"어서 와 어서 와 보고 싶었어 사랑해 사랑해 우리 언니"


어디 갔다 왔어, 왜 이제 와, 너무해, 왜 나랑 안 놀아줬어, 등등 너는 이해도 못하는 이유로 집을 비운 나에게 온갖 서운함을 이렇게 토로하고 화내도 모자랄 판에 좋다고만 말한다. 4년을 내리 같이 살던 너와 취업 후 헤어져 산지 벌써 3년 차,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을 너를 생각한다. 좋으면 좋아서, 힘들면 힘들어서 나는 네가 보고 싶다. 같이 있지 못하지만 너를 너무 사랑한다고 한없이 말해주고 싶다.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가 시작됐다. 우울한 현실과는 달리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하루 종일 네 옆에 붙어있는 것. 아무 생각도 않고 오롯하게 너를 보며 행복한 것. 주말 집에서 낮잠에 빠져 쓰러져있는 것도, 약속으로 다시 자리를 비우는 것도 아닌 컴퓨터를 놓고 하루 종일 내 옆의 복실복실 너를 쓰다듬으며 일할 수 있다는 것. 절대 방전되지 않게 충전기를 두고 뭔가를 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언니가 갑자기 들이닥쳐서는 어디 가지도 않고 집에 붙어있다니 그게 너는 좋으면서도 어리둥절해 보였는데, 간식을 몇 개 얻어먹더니 놀자고 보채지도 않고, 너는 내 옆에 가만히 엎드려 잠을 잤다. 무슨 꿈을 꾸는지 꼬리도 흔들고, 코도 골면서 뒹굴거리는 너를 보며 일하는 것이 나는 참 좋았다. 분홍빛 귀가 이따금씩 쫑긋거리는 사랑스러운 머리, 블루베리같이 작은 코, 말랑한 까만 발 네 개, 살랑거리는 보송한 털. 그 귀여움에 못 이겨 꼭 당겨 안았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사랑을 모아 덩어리로 만들었더니 네가 되었나 보다. 널 안고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한 걸 보니.




너의 하루는 아주아주 간단하면서도 명료하다. 아빠가 출근할 때쯤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눈을 떠서는 아침식사를 할 때 밥을 달라고 조르지. 식탁에 앉은 아빠에게 애피타이저로 간식을 하나 얻어먹고 나면 그제야 밥그릇의 사료를 오독오독 먹는다. 밥알을 하나씩 물고 와서는 관심도 끌어보고, 꼭 그걸 입에 물고 우리를 바라본다. 나 잘 먹죠? 나 예쁘죠? 하듯이. 매일 보는 모습인데도 귀여워 어쩔 줄을 몰라하니,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런 걸까.  처음 우리 집에 온 이틀, 무게감도 없이 안기던 솜털 같은 강아지가 밥을 안 먹어서 그렇게 나를 걱정시키더니, 사흘째부터는 밥을 빨리 안 준다고 삐약삐약 울던 네가 떠올라 웃고 말았다.


아빠가 출근하고 나면 다시 못다 잔 잠을 채운다. 엄마 옆에서, 내 옆에서 뒹굴거리다가 심심하면 간식을 얻어먹고는 장난감도 물고 왔다가 어느새 보면 콜콜 잠에 들어있다. 부엌에서 나는 도마 소리에 부리나케 달려 나간다. 뭘 하는 건지 알지도 못하면서 엄마 뒤에 앉아 세상에서 가장 충성스러운 눈빛으로 그 뒷모습을 빤히 보고 있다. 이러고 있으면 줄 거야, 분명 나한테 줄 거야. 너의 그 눈빛에는 그간의 경험이 진득하게 묻어나는 믿음이 담겨있다. 역시나 그 모습에 못 이긴 엄마는 오늘도 맛있는 것을 주고 말았지.


하루 중 가장 따뜻한 시간이면 산책을 간다. 나도 하던 일을 멈추고 너와 산책을 준비한다. 왜 그러는지 정말 모르겠지만, 산책이며 나가자는 말이며 다 알아들어서 꼬리를 흔들고서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도망만 다니다가 귀를 뒤로하고는 내 팔에 안겨 집을 나선다. 날이 정말 따뜻해졌다.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한 공원을 걷는다. 너도 따뜻한 날이 기분이 좋은지 통통 튀는 듯 기분 좋은 걸음으로 날 이끈다. 언니보다 내가 이 동네는 더 잘 안다고, 산책길도 가고 싶은 곳 정해서 나를 데려가는 것에 아주 익숙하다. 이 벤치 앞에서는 꼭 간식을 먹어야겠다며 고집도 피운다. 이 집 저 집 개들이 나 왔다감 댓글을 잔뜩 남겨놓은 모퉁이 냄새를 꼭꼭 맡는다. 그 조그마한 코가 어느 때보다 촉촉해서는 요리조리 움직이는 걸 보면 그때에서야 네가 개가 맞는구나 싶다고 생각한다. 다른 개가 멀리서 다가오면 모른 척, 가까이 다가오면 도망가고, 멀리 지나가버리면 그제야 뒤쫓아보는 이 겁쟁이. 공원을 한 바퀴 돌 때쯤이면 기분이 좋아 입이 살짝 벌어져있다. 너는 매일매일 비슷한 것 같은 일상에서 또 항상 비슷한 것 같은 이 시간을 온종일 기다리겠지.


집에 돌아와 간단히 씻고 간식을 먹고 나면 그때부터는 낮잠에 빠진다. 산책이 고단했는지 고롱고롱 코를 골고 엄마 무릎에도 올라갔다가 내 옆에도 누웠다가, 내가 만지면 눈을 슬쩍 떴다가 다시 폭 잠에 빠진다. 잠든 너만 보고 있다면 유난히도 험한 오늘의 세상이 온통 평화로운 것 같다. 오후 업무를 끝내고 퇴근시간에 맞춰 랩탑을 닫았다. 끝! 퇴근했다고 즐거워진 나를 보면서 너도 덩달아 일어나서는 장난감을 물고 온다. 타피오카 같은 까만 눈이 촉촉하니 신이 났다. 좋아하는 인형들을 던져주고 나면 저녁시간. 네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를 마중하러 문 앞까지 쏜살같이 튀어가서는 몽실몽실 엉덩이를 흔들며 아빠를 반긴다. 온 가족이 모여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너는 엄마와 아빠 사이, 나와 엄마 사이, 그 사이에 어떻게 해서든 비집고 앉아 가만히 이야기를 듣는다. 못 알아듣는 이야기가 뭐 그리 재미있다고 가만히 기대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밤이다. 아홉 시만 넘으면 혼자 침대나 소파 구석에 자리를 잡고 이른 잠에 빠진다. 이땐 건들어도 반응이 없고, 안고 다른데 데려다 놓아도 그 모습 그대로 누워있다. 자려고 누우면 엉덩이를 내 옆구리에 붙이고 눕는다. 내가 어떻게 움직일 줄 알고 이렇게 붙어서 자나 하지만 여기에 익숙해진 내 몸이 이렇게 저렇게 널 피하면서 잘 자게 되더라.


잠든 너를 보면서 생각한다. 무슨 인연이길래 너를 만나게 됐을까. 이렇게 보물 같은 존재가 있을까. 어디에 이렇게 온전히 사랑으로만 가득한 생명체가 있을까. 상상하기 싫은 미래에 네가 없다면 나는 가진걸 모두 잃은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이 생각은 언제 어디서든 눈물이 왈칵 쏟아지게 한다. 내가 언제까지 살지 모르겠지만 너의 수명까지만 내가 살 수 있다면 나는 바랄 것이 없겠다 싶었다. 오래오래 함께하자. 언니가 자주 올게. 온갖 감성 돋는 생각에 젖어있으면 자고 있던 네가 번쩍 일어나 날 보며 따라오라고 한다. 왜에, 하고 따라가면 역시나, 간식이 올려진 식탁 앞이다.


“그런 생각이 다 무슨 소용이야, 나 이거 먹고 잘래”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진다. 원하는 것을 얻어낸 강아지를 안고 잠자리에 든다. 나를 두어 번 핥더니 잠에 든다. 오늘도 좋은 하루였어.





익숙하지만 결코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 주말마다 보는 네가 그렇다. 항상 곁에 있어 이젠 잠시라도 없으면 이상할 정도지만 매일 보아도 새롭고 신기하고 사랑스러운 존재. 행복은 가까이에 있다는 그 흔한 말을 나는 너에게서 피부로 느낀다. 매일이 똑같아지는 이 지겨운 일상에서, 너는 어디 새로운 곳으로 굳이 벗어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같은 하루 속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아는 것. 느리고 조용하지만 세상 어느 곳보다 평화롭게 흐르는 너의 시간을 함께하며, 어제와 또 다른 오늘을 지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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